언젠가 고백한 적이 있듯이 나는 꽤 잘 버리는 편이다. 오랫동안 집 안을 지키던 사물일지라도 거침없이 버릴 각오를 갖고 있다. 회사에 있는 서류들도 비슷하다. 필요했던 문서나 논문들을 잘 모아 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구잡이로 버려 버린다. 반대로 회사 컴퓨터에는 20여 년 가까이 - 그러니까 회사 업무를 시작할 때부터 - 모아둔, 더블 클릭으로 열기 동작을 지정하기 전까지는 실체를 알기 어려운 0과 1의 집합체가 꽤 가득하다. 아무렇게나 하나의 폴더 안에 뒤죽박죽 섞여 있지도 않다. 몇 년도에 어느 팀에서 어떤 과제의 어떤 종류의 문서였는지 카테고리화되어 차곡차곡 쌓여있다. '잘 버리는' 성격이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것을 고이 간직해 두며 지내왔다.
버리는 행위 - 실존 하는 원형의 플라스틱 휴지통은 아니지만 그림을 보면 딱 그것처럼 보이는 곳에 던져 넣는다는, 개념적으로는 파일이라는 흔적을 삭제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매 해, 마치 책상 위 또는 서랍 속에 흩어져 있던 서류 또는 잡동사니를 정리하듯, 컴퓨터에 있는 파일 중 불필요한 것은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다. 애를 썼다는 건 내 의지에 반하여 잘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문서들은 시간이 지나면 효용 가치가 높지 않다. 한동안은 업무 주보를 정성스럽게 모아 두었다. 지금은 사내 허브 시스템에 온라인으로 작성하면 되지만 예전엔 엑셀 파일에 하나하나 적어 두어야 했기 때문에 파일이 매주 하나씩 생겨났다. 다른 사람의 업무 파일도 같이 받아서 정리를 해야 하고, 옆 파트의 주보도 참고하려니 파일의 크기는 작지만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걸 오랜 햇수 동안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 갑자기 불시에 참고하려고 찾아볼까 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있었지만 실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 몇 년 지난 업무 주보가 무슨 소용이랴. 기록으로서 가치는 있지만 정말 궁금하면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러므로 업무의 흔적을 모아두는 것은 작은 집착과도 같았다.
그 집착의 이유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해 보지는 않았었지만 스스로 질문을 버리지도 않았다. 왜 나는 이걸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끼던 오브제나 추억의 물건들 마저도 충동적으로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 의문은 더욱 컸다. 나란 사람의 정체성, 일관성을 위해서는 버리고 지우는 행위가 충분히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할 수 있는데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못하든 안 하든 왜 그런 건지 가끔 궁금해지는 질문에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 답을 갑자기 책에서 찾게 되었다.
사실 여러 해의 노동의 결과를 사방의 벽에 걸어놓고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다. 우리의 모든 지능과 감수성을 한 장소에 모아둘 기회는 더군다나 찾아보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노력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상관물을 찾지 못한다. 우리는 거대하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집단적인 기획들 속에서 희석되고, 그러다 보면 작년에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진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우리가 어디로 간 것이고, 도대체 무엇이 된 것인지 궁금해하다가 결국 퇴직 기념 파티 같은 분위기에 젖어 우리의 사라진 에너지들을 바라보게 된다.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노트북 안에 존재하는 각 파일의 저장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누군가에게 받았던 흥미로운 주제의 논문, 프레젠테이션에 적절하게 써먹을까 싶어 모아 둔 재미난 짤, 내외부 강연 자료, 참고하려고 캡처해 둔 그림 파일, 해마다 때마다 업데이트된 전략 자료들, 결재 전 오류는 없는지 검토 요청을 받은 보고서, 이미 결재가 끝난 타 부서의 보고서, 매년 업무가 끝날 때를 기록하기 위해 남겨 둔 백서까지. 탄생의 이유는 분명 명확했으나 그저 out-of-date라는 이유로 쓸모가 없어진 것들이 솔직히 말하면 대다수이다. 지금 당장 지워버려도 별 문제없을 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내게 10년 전 자료를 요청하지도 않고, 나도 정말 필요해서 2017년의 문서를 뒤적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이유는, 불필요하고 자잘해 보이는 그것들이야말로 내가 벌이거나 관여했던 많은 작업의 부산물이자 결과의 흔적이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끼는 자료들은 내가 직접 참여했던 과제와 업무의 결과물이다. 이제는 후배를 위해 또는 회사를 위해 남겨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업무 백서도, 어쩌면 나란 사람의 흔적을 남겨 두고픈 비열한 저의가 있는 건 아닐까. 마치 나무나 돌 위에 이름을 새기듯 '나 여기에 머물렀었다'와 별다를 것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업무에 필요하여 어렵게 찾은 참고 논문도 소중하고 남의 팀 보고서도 가치가 있지만 만약 저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지워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1순위로 버려도 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잊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뇌는 선별적으로 기억하고 필요한 것만 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물리적 저장 장치는 그 용량이 허락하는 한 사소한 메모조차도 모두 모아둘 수 있다. 그러므로 버리지 못하고 남겨 둔 과거 자료들의 효용 가치는 쓰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아두는 것 자체에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