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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May 22. 2023

기대도 실망도 없는
지금이 바로 위기

오늘 여럿이 모이는 회의가 있었다. 브랜드의 방향성에 대해 소개를 받다 보니, 우리 파트의 업무와 밀접한 내용이 나왔다. 보통은 그런 내용이 나오면 몸을 앞으로 숙여 열심히 듣거나, 머릿속에서는 저걸 어떻게 하라는 거냐?! 말도 안 되는 걸 들고 와서 또 해내라고 독촉하겠군, 이런 생각이 종종 들었었다. 욕하고 투덜 대면서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그런 상황. 그런데 오늘은 그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심지어 다른 부서의 조직장이 배경 설명을 해주는 데 듣는 척도 안 했다.


회사의 업무가 어찌 내 마음대로야 되겠냐마는 어쩐지 요즘은 기대도 실망도 없다. 우리와 협업을 하는 상대 조직에선 대단한 걸 들고 오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거의 비슷하다. 형태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를 바 없는 속내를 다루다보면 흥미가 점점점 떨어진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 이 업무를 시작할 때는 뭔가 다르게 해 보리라 마음먹은 바가 있었다. 일을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서로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그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나름 짜릿함과 보람이 있었던 나였다. 최근에는 그런 설렘보다는 익숙해진 일상의 일과로서 업무를 ‘처리해 내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A라는 업무는, 음, B라는 사람이 C라는 실험으로 결과를 얻으면 되겠군. 잘 조직된 기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딱딱 들어맞는 전형성은 업무의 효율을 높인다. 일처리를 하는 프로세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거의 기계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상황 파악 - 핵심 문제 발견 - 해결 방안 모색 - 실행 - 결과 - 완료’


편하다. 고민의 시간이 줄어든다. 솔루션을 제공하면 그걸로 된다. 우리 부서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는 것이라 명분도 좋다.


문제는 고도로 발달된 체계는 별로 재미가 없다는 점에 있다. 물론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빈 구석은 있고 논리적인 완벽함을 갖추지는 못한다. 상사가 공격할 만한 부분은 존재하는 법이니 허술한 구멍을 메워야 한다. 그러나 허술함이야 어쩔 수 없다는 상황논리로 어물쩡 넘어가고, 결과론적으로 해소해야 하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일상이 돌아가고 나니, 나는 어쩐지 업무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프로세스라는 것은 일하는 방법론으로 연결이 된다. 이 방법론이 어느 한쪽(효율성 위주)으로 기울어지고 익숙해지니 ‘생각이란 것을 멈춰 버렸다!’. 효율성이 극대화 되려면 다양한 생각의 기회 보다는, 잘 맞춰진 틀 안에서 가급적 작은 변화만을 추구하기 쉽다. 큰 틀을 기반부터 흔드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에 뭔가 해보려고 했어도 환영받지 못하거나, 내가 어떤 의사결정을 하고 추진하던 일이 반대 의견에 몇 번 무산되다 보면 ‘내가 왜 이걸 굳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자라난다. 뭔가 해 볼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해도 동조가 없으면 힘이 빠진다. 나는 이걸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부른다.


출력값이 달라지려면 입력이 다르거나 처리하는 과정이 달라야 한다. 아니면.. 아예 다른 입력이 되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 다른 관점을 가진 새로운 인력이 보충되거나 물갈이되어야 할 필요도 느낀다. 이렇게 나는 하는 일에 재미도 감동도 없는 오래된 회사원이 되어가는 것일까? 어쩐지 위기감이 느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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