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주의보라던가, 장마로 인한 비 피해 주의 뉴스가 아무렇지 않은 7월의 어느 날, 지난 4월에 적어 두었던 메모를 끄집어내었다. 이때 왜 이런 생각을 했었으려나, 나 조차도 궁금해지는 마음 한 구석. 힘을 빼고 내 생각을 가만히 적어볼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의 의미를 모색하기로 한다. 친절한 글쓰기를 지향하지만 설명 대신 날 것의 의식들을 덜 다듬은 채, 마치 완성하지 못한 요리를 대접하듯 내놓아 본다.
어느 날 산책 길에 - 잘 생기고 키 큰 외국인이 지나가는 걸 보고, 참 보기 좋다고 느꼈다.
별로 멋 부리지 않았는데 그냥 그 자체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남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어쩐지 보는 것만으로 '좋다'하는 그런 마음.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저 '참 곱다, 예쁘다'하는 말이 이제는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외국인을 보고 느낀 감정도 이와 비슷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점은 어디에 있을까.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과 공감은 당연한 것일까.
아니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맞긴 한 건지.
피부색, 인종, 성별과 무관하게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건 인간이라면 얼추 비슷하려나?
상대적 추함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멋있으면 그뿐이지 아름다움의 보편성을 논할 이유는 없을지도.
장례식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고인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잠시 시간을 내어,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고 추억하는 시간과 장소가 맞지 싶다.
"죽음이라는 게 참 구체적인 의식이네"(눈물의 여왕)
내게 있어 장례식이라면 고인과의 연관성보다는 장주와의 관계 때문에 찾는 일이 더 잦았다. 아직 지인들 중에 본인상을 치를 상황이 거의 없으니 당연한 것이다. 하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눠주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 덕분에, 친자식조차 잘 모르던 고인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게 맞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에 가는 이유가 명목 상 부조를 하거나 장례식장을 북적이게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으면 한다. 망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돌리는 '부고' 메시지의 무게와 의미를 괜히 비틀어 생각하는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