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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Jul 10. 2024

4월의 메모를 들추어.

폭염주의보라던가, 장마로 인한 비 피해 주의 뉴스가 아무렇지 않은 7월의 어느 날, 지난 4월에 적어 두었던 메모를 끄집어내었다. 이때 왜 이런 생각을 했었으려나, 나 조차도 궁금해지는 마음 한 구석. 힘을 빼고 내 생각을 가만히 적어볼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의 의미를 모색하기로 한다. 친절한 글쓰기를 지향하지만 설명 대신 날 것의 의식들을 덜 다듬은 채, 마치 완성하지 못한 요리를 대접하듯 내놓아 본다. 



올봄을 지나며

어느 날 산책 길에 - 잘 생기고 키 큰 외국인이 지나가는 걸 보고, 참 보기 좋다고 느꼈다.

별로 멋 부리지 않았는데 그냥 그 자체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남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어쩐지 보는 것만으로 '좋다'하는 그런 마음.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저 '참 곱다, 예쁘다'하는 말이 이제는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외국인을 보고 느낀 감정도 이와 비슷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점은 어디에 있을까.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과 공감은 당연한 것일까. 

아니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맞긴 한 건지. 

피부색, 인종, 성별과 무관하게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건 인간이라면 얼추 비슷하려나?

상대적 추함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멋있으면 그뿐이지 아름다움의 보편성을 논할 이유는 없을지도. 



부고를 대하는 자세

장례식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고인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잠시 시간을 내어,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고 추억하는 시간과 장소가 맞지 싶다. 


"죽음이라는 게 참 구체적인 의식이네"(눈물의 여왕)


내게 있어 장례식이라면 고인과의 연관성보다는 장주와의 관계 때문에 찾는 일이 더 잦았다. 아직 지인들 중에 본인상을 치를 상황이 거의 없으니 당연한 것이다. 하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눠주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 덕분에, 친자식조차 잘 모르던 고인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게 맞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에 가는 이유가 명목 상 부조를 하거나 장례식장을 북적이게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으면 한다. 망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돌리는 '부고' 메시지의 무게와 의미를 괜히 비틀어 생각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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