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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Jul 21. 2024

작은 물통, 큰 깨달음

화를 내려놓고 얻은 평안

중학생 아들의 일반적인 귀가 시간은 학원을 마치고 나면 8시가 넘고, 최근 영어인지 수학인지는 학원 시간이 바뀌어 10시 이후에나 얼굴을 볼 수 있는 형편이다. 어른보다 더 바쁜 삶을 사는 아이가 안쓰럽지만 그의 행동에는 나를 화나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다. 가령 방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거나, 침대 이불을 널브러진 채 두거나, 옷을 방바닥에 흘리고 다니는 것과 같은 일이다. 수없이 주지를 시키고 게임 시간을 줄이는 페널티를 줘도 소용이 없다. 개선의 여지를 보이는 건 채 3일을 가지 못한다. 또 하나 화를 종종 돋우는 일은 바로 물통을 제때 꺼내 놓지 않는 것이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물품 중에 보온보냉 물통이 있다. 이걸 씻어둬야 다음 날 다시 가져가는데 문제가 없는데 늦게 와서 그런지, 아니면 정신이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어차피 물통 설거지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아빠의 일이라 그런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의 일을 다 끝내고 쉬는 시점에 물통을 꺼내 놓는 것도 마땅치 않지만, 나도 챙기지 못한 다음 날 아침에 식탁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그것을 보면 정말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도 출근 준비를 하려고 거실로 나오다 보니 식탁 위에 그의 초록색 물통이 딱 나를 기다리듯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화가 나지도 않고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집어 들어 후루룩 씻고 차가운 물을 다시 채워 넣었을 뿐이다.


자잘한 집안일을 처리하다 보면 도움을 주지 않는 가족 구성원에게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분명히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쓰레기 봉지가 있고, 약간의 귀찮음을 더하면 개수대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그들은 늘어놓는 스타일이다. 치우는 것은 대개는 나의 몫이다. 와이프는 자기도 한다고 하고,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집안의 잡다한 일이 힘든 건 강도 보다 빈도에 있다.


실은 바로 전날 최근에 쌓였던 감정들을 좀 풀어놓을 기회가 있었다. 그 덕분인지 화든 짜증이든 뭔가 나쁜 감정을 떠올렸을 상황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봄날님이 소개해주신 책, <나는 가장 슬픈 순간에 사랑을 떠올린다>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경비원을 하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난다. 오늘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깨진 그릇 두 뭉치와 일반 쓰레기를 버린 것을 봤다. 꺼내서 처리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경비원은 잘못된 것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사람이다.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열심히 치우기로 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종종 화가 나는 때는 내 뜻대로 하려는 생각이 강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나의 기대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고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화가 난다. 세상 일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의 요동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집안일 챙기다가 화나는 것을 이야기하니 아내는 ‘그걸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했는데, 곰곰이 다시 돌아보면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역할’이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분명한 역할을 규정하지는 않은 채 마음속으로만 기대해 놓고, 상대가 그걸 수행하지 않음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하기 시작하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맞다, 틀리다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대게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기 마련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나의 행동은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늦다 못해 아예 다음 날로 미뤄진 아들의 물통에 아무 감정을 싣지 않으니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미숙하고 배려가 부족한 행동의 교정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한 덕목이겠지만, 그 이전에 내가 너그러워져야 감정을 죽이고 훈육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니 집안의 다른 일들도 이전보다는 덜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대한다면 확실하게 말하고, 그것이 안된다면 굳이 공들여 애쓰지 않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챙겨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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