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여행을 간다고 했더니 후배 하나가 고맙게도 책을 선물해 주었다. 에릭 와이너라는 작가가 쓴 <행복의 지도>를 건네며, ’여기 아이슬란드 얘기도 나온데요’라고 했다. 네덜란드, 부탄, 스위스, 미국 같은 나라들이 그 리스트에 있다(당연하겠지만 한국은 없다). 비행기에서 읽을 자신은 없어 수화물로 보낸 책을 드디어 첫날밤 꺼내 들었다. 숙소 침대에 몸을 기대고 당연히 아이슬란드 편을 제일 먼저 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아이슬란드에 있으니까.
북유럽이 종종 유엔에서 조사하는 나라별 행복지수에서 상위권에 속한다는 것은 들었지만 아이슬란드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높은 위치인 것은 처음 알았다. 그런데 나의 첫인상은 대체 이 나라에서 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였기 때문에 우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정말 몇 안 되는, 스치듯 지나간 한국 사람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야, 여긴 심각해(재미없어서)’. 수도인 레이캬비크는 정말 작은 동네다. 아담하다. 사는 사람도 고작 14만 명 정도밖에 안된다. 관광객 입장에서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면 되니 편하기도 하지만, 버스나 택시 같은 수단을 이용하지 않다 보니 만보기가 금방 채워진다는 - 알게 모르게 피곤이 쌓이는 - 특징 또한 피할 수 없다. 아무튼 그래도 수도니까 좀 대단한 것이 있겠지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다이내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K-바쁨의 나라에서 갑자기 한적한 동네로 순간이동을 해서 그런지, 도착 후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시내 구경을 하면서,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남 걱정을 했더랬다. 행복지수가 탑 3인 나라 사람들을 염려해 주는 저 아래 50위 권에서 사는 내가 말이다.
오늘의 버스 투어는 이른바 ’골든 서클’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관광객이라면 꼭 해봐야 하는 필수코스 모음집을 한 바퀴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원래 가려던 폭포 구경이 있었는데 1시간 전에 사고가 있어서 폐쇄가 되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가이드는 마침 지나가는 곳이 자기가 태어난 장소라며 우리를 그리로 안내했다. 하긴 남들 다 찍는 뻔한 사진 몇 장 건지기 위한 폭포수 배경 보다, 현지인이 살고 있는 작은 동네를 찾아가는 것이 진짜 여행의 맛일 것이다. 온 동네 사람들 다 합쳐도 200명 정도라 하며, ‘그게 좋을까요, 나쁠까요’라고 묻는 가이드의 농담 섞인 질문이 자못 의미심장했다. 글쎄 난 옆 집에 누가 사는지 다 알고 무슨 일이 있는지 순식간에 펴지는 그런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묵고 있는 숙소의 호스트(필리핀 사람) 역시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관광객이 사라져 거리에 나가면 늘 보던 얼굴만 가득했던 기억이 참 별로라던 말도 생각났다.
아이슬란드의 땅 아래에는 마그마가 가득하고 지표면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지열이 풍부하다. 그 지열로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가이드는 우리를 호숫가로 안내했는데 거기도 지열 발전을 하는 장소가 있어 보글보글 끓는 물과 열로 인한 증기가 희미한 유황 냄새와 함께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 지열 발전이 얼마나 자신들의 삶을 돕고 있는지 열변을 토했다. 한 달에 3만 원 정도만 내면 전기를 펑펑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 건물 안에는 수영장도 있고, 농구장도 있단다. 옆에서 누군가 그런다. 200명 동네에 그 정도 시설이 놀랍다며. 겨울이면 얼어붙은 호수에서 스케이트도 탈 수 있다 했다. 아, 게다가 이 호수는 따뜻한 물이 흘러들어 절반만 얼음이 얼어서 특별하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스케이트를 타는데 반대편에선 수영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가이드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마음속 깊은 자긍심이 느껴졌다.
나는 우리나라의 놀라운 발전 상에 대해 어려서부터 교육받으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모습에 익숙하게 컸다. 전쟁 이후 고도로 빠르게 압축 성장한 나라. 전 세계에서 경쟁력 있는 반도체 산업을 갖고 있고, 이제는 소위 K-콘텐츠로 인해 문화 강국으로도 손색없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이 놀랍고 꽤 멋진 일이라며 소위 국뽕에 찬 적도 많다. 강남스타일이 뉴욕에서 울려 퍼질 때, 타임스퀘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춤 추는 생경한 광경에 놀라 몇 번이나 그 영상을 돌려봤다.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전세계 1위를 차지할 때는 감격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분명 자랑스럽지만 그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지 싶다.
<행복의 지도>는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저자가 전쟁과 같은 불행한 뉴스만 전하던 자신을 벗어나, 행복한 나라가 궁금해서 발품 팔아 인터뷰하고 직접 그 나라를 체험하며 쓴 책이다. 이 책의 아이슬란드 편에 따르면 이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들이 가진 특별한 자신만의 언어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하는 시기심 없는 창의력의 발산 때문이기도 하다. 실패가 쉽게 용인되므로 무엇을 몇 번이고 다시 해도 괜찮단다. 남을 지적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조차도 창작의 고통 때문에 불행하기보단 오히려 더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뜬금없지만 다 큰 성인들도 엘프의 존재를 믿는다는 얘기 또한 빠지지 않았다.
또 다른 버스 가이드가 이동 중에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그는 ‘true story’ 임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아마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떤 집에서 40여 년을 산 노년의 남성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혼자 지내기에 큰 집을 팔고 이사를 하고 싶었다. 마침 신혼부부가 구경을 왔고, 그들은 거래를 성공적으로 하게 되었다. 대신 신혼부부는 이미 낡을 대로 낡은 집을 고치고 싶었고 적당히 리노베이션을 하여 이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매일 밤 잠을 설치게 되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원래 주인이었던 사람에게 ’혹시 이 집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솔직하게 말하라’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40년이나 살았으니 어떤 문제도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면의 밤은 이어졌다. 다시 이전 주인에게 묻자, 건물 바깥에 무슨 일을 한 적 없는지 물었단다. 공사를 하면서 나온 쓰레기며 자재들을 언덕 뒤에 방치했다는 말에, 당장 치우라는 답을 들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엘프가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결론은? 깨끗하게 치우고 나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안하게 지내게 되었다며, 역시나 마지막에는 ‘진짜라니까’를 잊지 않았다. 그의 말에도 확실히 진정성이 있었다.
발길 닿는, 아니 닿을 수도 없는 곳곳에 놓인 기암괴석과, 구름 속에 갇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높은 산꼭대기와, 이끼로 뒤덮인 용암 지대를 지나며, 그리고 밤마다 펼쳐지는 오로라의 향연을 겪으며 여긴 신화가 없을 수 없겠다 싶었다. 이렇게 신비로운 자연을 보며 어지간한 전설 하나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사람으로서 직무 유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 시기에도, ‘엘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이들의 순수함이 놀랍게 느껴졌다. 이 즈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들이 어떤 재미로 사는지 참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지 대충 느낌적 느낌으로 알 만하다. 보통 순수하다는 표현은 세상 물정 모른다는 부정적 의미가 살짝 있는데, 여기 사람들은 말 그대로 순수하긴 한가 보다. 물론 경제적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여러 인프라와 자연의 혜택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만, 적어도 행복의 모든 이유가 거기에만 있진 않을 것이다.
덧붙여. 난 언제 화산이 터질지 몰라 불안하여 이 나라에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여기 노인들은 죽기 전에 화산 안 터져서 못 보고 세상을 뜨면 어쩌나 하는 태평한 생각만 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