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도착 후 잠깐을 제외하고는 매일 투어를 다닌 덕분에 쉴 틈 없었다. 바빴고 많이 봤고 즐겼다.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도 아니요,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 것도 아니다. 여행 중간중간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어, 젠장 이 놈의 나라 다시는 오나 봐라, 이런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내는 동안 날씨는 지나치게 좋았다. 어제저녁부터 시작된 돌풍 덕분에 ’이제야 아이슬란드를 제대로 맛보는군 ‘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나 내가 여행한 9월 중순의 아이슬란드의 날씨는 완벽한 가을 그 자체였다. 첫날의 흐림만 제외하면 매일 아침 햇빛을 만날 수 있었고 바람도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사람보다 풍경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고 오며 바깥에 펼쳐진 멋진 호수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이 호수는 어쩌면 50년 전, 100년 전에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봤다.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지만 어딘가 인위적인 모습이 없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한다. 호숫가 주변으로 먹을거리를 팔지도 않을뿐더러 ‘좋은 뷰를 자랑하는’ 별점 5개짜리 카페는 당연히 없었다. 또는 어정쩡한 조형물도 떡하니 들여놓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자연을 보고 즐길 수 있게 둔 것이다. 그나마 있는 인공물은 사람들이 더 잘 볼 수 있게 설치된 데크나,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둔 표지판이었다. 한글로 된 설명이나 가이드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이슬란드 관광청(?)은 한국 관광객을 위해서도 신경 써주기 바란다.
어쨌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은 하필이면 오늘따라 왜 이리 아련한지. 예전 같으면 투어 버스에서 내려 바로 숙소로 갔을 지친 발걸음을 시청 옆 작은 호숫가로 옮겨 본다. 갑자기 모든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예쁘게 다가온다. 사람들의 몸짓, 먹이를 달라며 꽥꽥 울어대는 거위 울음소리, 누군가 떠나며 놓고 간 맥주잔마저 괜히 사연 있어 보인다. 석양빛을 보아하니 이곳의 명소 할그림스키르캬 교회가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 오후 내내 쉽지 않은 화산 트래킹을 해서 지쳤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언덕을 올랐을 때 기대만큼 멋진 풍경은 아니었지만, 밋밋하게만 보였던 교회의 외관이 골든아워의 빛 덕분에 입체감 있게 살아나 있었다. 두어 장의 사진을 남긴 것이 전부임에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스름한 골목 풍경도 담는다. 내 삶에 다시 여기를 올까 싶은 아쉬움이 사진에 묻어나는 건 순전히 내 착각일 것이다.
발길을 돌려 이제는 정말 숙소로 갈 시간. 어쩐지 거리가 더 활기차 보인다. 이른 저녁인데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분명히 오늘 도착했을 법한 표정을 지닌 관광객들의 기대 섞인 얼굴, 펍과 식당으로 향하는 무리들의 뒷모습을 보니 갑자기 재미없던 이 도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안전하고 적당히 조용하여 살기에 썩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게 무슨 미련이람. 상대는 애초에 내게 관심도 없었는데 괜히 나 혼자 싫었다 좋았다 하는 게 우스운, 여행 마지막 날의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