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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 즐겁지 않아요?

by n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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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이었고, 원래대로라면 4시쯤엔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주 월요일 오후에 있을 미팅 전에는 비교적 완성된 프로젝트 운영 기획 드래프트가 필요했다. 지난 2-3주 동안 작업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진도가 더뎠다. 마음 급한 상무님과 이미 오전부터 미팅을 두 번 마쳤고, 오후 내내 혼자 수정했지만 마음에 썩 들만큼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종일 컴퓨터 앞에 있었고, 바쁜 그녀는 미팅룸을 오갔다. 모든 미팅이 끝나고 와서야 내 자료를 재검토 하기 시작한 건 4시 반쯤부터였다.

-이렇게 고칠까요?

-둘 중 어느 게 맞을까요?

-표현은 적합한가요?

마침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자 “됐네. 이 정도로 하고 그만 퇴근할까요?”라고 말했을 무렵은 5시 반이 넘었을 때였다. 떠나려고 준비하는 내게 상무님은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 즐겁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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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후배와 잠시 티타임을 하던 중 질문을 받았다.

후: 하는 일은 어떠세요?

나: 도전적이고 힘들지만 할만해요.

후: 근데 저는 못할 것 같아요. 답을 찾는 것에 더 익숙해서… 근데 선배도 그렇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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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가 말한 ‘답을 찾는’ 일은 주로 실험하고 결과를 얻는 성격의 것이다. 힘들지 않냐고 가리킨 (다시 말해 답보다는 주로 질문을 던지는) 일은 ‘기획’이라고 볼 수 있다. 굳이 두 업무 성격 사이에서 더 익숙한 것, 비교적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르라면, 여전히 후배의 말마따나 답을 찾는 일을 선택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어떤 새로운 질문의 필요성보다는, 주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빠르게 또는 효율적으로 찾아내서 사업에 기여할지 요구받아 왔다. 가끔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잠깐 지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본격적인 기획 업무를 하다 보니 두 가지 방식의 질문을 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미 현실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더 나은 방식은 없는지 찾는 질문

-뚜렷하지도 않고, 남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기획자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떠올리는 질문


그게 무엇이든 일단 질문을 꺼내는 힘,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게 없으면 여전히 답을 찾는 일에만 사고가 갇히게 된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더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답을 찾는 일이다. 질문만으로 완성되는 회사의 일이란 없다. 단, 답을 찾는 과정에서 두 발은 현실의 땅을 단단하게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좋은 기획도 현실성 하나 없는 이상적인 전개는 교과서에 나오는 사례를 넘기 어렵다. 교과서에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게는 만들 수는 있어도 현장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뭐라도 구체적인 것(프로세스든, 회의 방식이든, 구성원 참여든)을 ‘있음’으로 만들어 내는 일은 할 때마다 어렵다. 이상향을 그리다 보면 현실성 없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반면, 현실을 충분히 고려해서 여기저기 다 만족스러운 상황을 만들려다 보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보이지 않아 정작 필요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구체적 액션들을 뽑아내기 힘들다. 만약 존재하지 않던 프로세스라도 설계하는 일을 할라치면, 상상 회로를 돌리기도 벅차지만 과연 이게 올바른 답인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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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하면 집에 와서 일은 하지 않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저녁을 먹은 뒤 밤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퇴근 전에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렀던 내용이 머릿속에서 잊히기 전에 완성하고 싶었다. 피곤하지만 꼭 마쳐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니까 가끔은 나만의 규칙을 어기는 것도 필요하다.

다음 날 아침, 맑은 정신에 자료를 훑어보니 자잘하게 고칠 것이 눈에 띄었다. 다시 좀 더 손을 봐서 수정하고 얼은 상무님에게 보냈다. 주말이었지만 자료를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남은 주말 시간을 찝찝하게 보내기 싫은 내 상황도 있다). 잠시 후 엄지 척과 함께 고맙다는 말, 그리고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Innovation isn’t just about ideas; it’s about the process that turns ideas to impact”.


처음 보는 표현인데 썩 맘에 든다. 특히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process)임을 강조한 것이 좋다. 덕분에 기획의 결과물을 얻는 과정들을 복기해 보니 그녀가 보낸 말처럼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의 반복 또 반복이었다. 고민 끝에 비로소 이상과 현실의 중간 어디쯤 적당한 지점을 찾아낸다. 그걸 정리한 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만나 설명하고 변화를 위해 설득한다. 이 정도면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게 하면 괜찮을 것 같다, 처럼 상대의 동의와 합의를 이끌어 내는 그것, 혼자든 함께든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주는 묘한 희열이 있다.


이처럼 고민을 싸매고 어둠 속을 헤매다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결과가 얻어질 때가, 어쩌면 상무님의 질문이었던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의 즐거움’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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