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 프로젝트를 실제로 수행하는 리더, 그리고 참여자로 최소 한두 명에서 많게는 10명 내외의 구성원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연구소의 프로젝트는 팀 중심으로 기획되고 운영되어, 소장급에서 프로젝트 오너를 맡는다. 프로젝트 오너는 주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역할이다. 프로젝트의 중요성과 전략적 판단에 따라 소장보다 상위 리더가 오너로 활동할 수 있다. 프로젝트 리더에게 성공과 실패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이 주어지긴 하지만 역시 마지막은 그걸 실행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일 수밖에 없다.
팀 단위의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해당 팀에게만 영향을 주는 일은 거의 없다. 다양한 부서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관련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기초 연구를 진행하는 팀의 결과물은 소재나 제형을 개발하는 부서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기초 연구 결과를 활용해서, 실체가 있는 형태(제품)로 어떻게 만들어 낼지 고민한다. 그러므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이런 사람들을 흔히 이해관계자로 부른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오너, 리더, 구성원, 그리고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중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프로젝트가 회사의 전략과 잘 맞을 수 있게 기획부터 참여한다. 현업 부서에 있는 사람들은 접하지 못하는 정보를 수집, 정리해서 프로젝트의 참여자들에게 전달한다. 현장의 담당 연구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 운영의 프로세스를 알려주기도 한다. 대개 연구자들은 자기 기술의 전문성이 높은 반면, 회사의 운영 방침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경우가 다반사다. 또는 타 부서(이해관계자)의 상황 등에 대해 면밀하게 파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와 실제 프로젝트의 성과가 연결될 기회를 모색한다. 즉 중간자라는 위치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즈니스 측면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도록 끌고 가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인 역할이라고 인식된다. 하지만..
실제 프로젝트의 리더나 오너가 아닌 이상, 진행의 방식과 방향은 프로젝트 매니저의 것이 아니다. 최종적인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매니저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지난 1년은 프로젝트 매니저의 자리에서 많이 배우고 또 쓰라린 맛을 보기도 했던 한 해였다. 과제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여러 의견을 낼 수 있었고 또 그게 반영되는 기쁨을 가졌다. 그러나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상위 직급자로부터 ‘그건 당신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따끔한 지적을 받은 적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역할과 남들이 기대하는 역할 사이에서, 적절하게 선을 잘 타면서 조율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말이 좋아 ‘조력자’라고 하지, 아무 힘도 없는 것 아닌가?라는 시각도 존재할 것이다. 나쁘게 보면 그렇긴 한데 한계에만 집착하면 패배주의적 시각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매니징 하면서 재미를 찾는 요소들이 생겼다. 예를 들어 어떤 프로젝트의 장점을 다른 프로젝트에 전파하기도 하고, 반면교사 삼아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실패의 요소를 줄이기도 했다.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경우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으로 리셋되기도 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나름 성장의 기회였다고 생각이 들어, 당분간은 프로젝트 매니저의 역할을 쉽게 내려놓지는 않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생각한다.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자리는 화려하지도, 결정권이 크지도 않다. 바삐 뛰어다니지만 늘 무대의 뒤에 서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보이지 않는 틈을 메우고, 때로는 작은 아이디어의 불씨를 살려내는 역할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비록 ‘조력자’라 불리지만, 언젠가는 그 조력이 누군가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자리에 머물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