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잠시 설전이 벌어졌다.
엄마: ”여행 가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냐. 특히 해외여행은 더 그래.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떠나면 며칠 안 되는 시간 중에 하루이틀은 그냥 날리는 거나 다름없어”
아들: “나는 그런 여행보다는 약간 계획 없이 가는 게 내 스타일이야”
엄마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여행을 경험했다. 그녀의 말처럼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이 되어버리면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곳에서 제대로 된 체험이나 방문을 못할 수 있다. 남들 다 가는 곳을 똑같이 방문하는 것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대충 보내다가 오는 것 또한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아들은 늘 부모가 짜주는 루트와 계획 하에 여행을 해 왔다. 그러니 어떤 여행의 전체 또는 일부에서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남이 타주는 커피나 끓여주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곤 하지만, 여행을 적잖게 다녀본 내 입장에서도 그게 항상 좋았던 건 아니었다. 물론 패키지가 주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어디를 언제 어떻게 가야 할지, 혹시 방문했을 때 문을 닫지는 않았을지, 가는 길이 어렵고 힘들지 않을지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행의 당사자가 통제하지 못하는 전반적인 상황에서 오는 적잖은 답답함은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또한 어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가듯 떠나는 여정은 불안함으로 연결되는 것이 당연하다.
언젠가 동료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본인은 여행 준비를 하기는 하지만, 치밀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너무 자세하게 준비하다 보면 이미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하고 공감한다.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들을 접하는 것이 되려 익숙함으로 연결되어, 정작 여행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와봤던 것인 양, 일종의 기시감이 들었던 적이 꼭 있었다.
한편으로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 중에, 특히 사진으로 보는 장면이 너무 멋져서 기대감이 엄청나게 자라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정작 사진에서 보았던 풍경이 현장에서는 제대로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지난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이상하게 높은 기대를 가졌던 스폿이 하나 있었다. 바로 ‘스코가포스'라는 폭포였다. 언젠가 컴퓨터의 배경 화면으로 소개된 적이 있는 이 장소는 거대한 폭포가 주는 자연의 위압감과 장엄함으로 큰 인상을 남겼었다. 그때는 아이슬란드에 있는 장소인 줄도 몰랐다. 여행을 준비하며 바로 거기가 그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연히 기대감은 자연스레 무럭무럭 자라났다.
막상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약간의 실망감이 먼저였다.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 생각해 온 장소와 폭포의 모습인지 헷갈렸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런 기대와 실망을 강요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큰 감동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방문한 장소에서 뜻밖의 감정을 느낀 적도 많다. 어쩌면 그것이 여행이 선사하는 의외의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작년 말, 우연히 <핑계고>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소위 P들의 여행을 본 적이 있다. MBTI에서 마지막을 차지하는 J와 P의 가장 큰 특징은 계획성 vs. 즉흥성이다. 모두 다 ‘P’, 즉 즉흥성을 가진 유재석과 지석진, 황정민, 양세찬 4명이 베트남으로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핸드폰 사용 금지라서 당연히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콘셉트였다.
요즘은 해외든 국내든 어디 식당 하나라도 들어갈라치면, 평균 별점이 몇 점인지, 다른 사람들은 만족했는지 어떤지 찾아보고 가는 것이 소위 '국룰’인 시대다. 정보는 넘쳐나고 그 안에서 진실과 거짓을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 나를 비롯하여 - 쉽게 오지 않을 기회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검색 찬스를 마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것을 거의 정하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진행된 여정을 보며 나는 깔깔대며 웃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저런 여행의 방식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렇게 '정확한 정보와 방향'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이 오래되지 않았다. 구글 지도, 카카오 지도와 같은 길잡이가 없던 시절엔 말 그대로 정말 책으로 된 지도를 펴고 돌아다녔다. 물론 그때도 계획은 있었지만, 그 계획을 지켜내기에는 많은 변수들을 다 고려할 수 없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려면 몇 번 출구로 이동해서, 어떤 경로로 이동해야 최적의 도보 루트가 나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얼마를 기다려야 다음 탈 것이 도착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20대 후반에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미국 뉴욕을 여행한 적이 있다. 1년의 유학 시절 중에 몇 개 안 되는 대도시 방문의 마지막 기회였다. 꽤 많은 장소를 계획대로 방문했는데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가족보다는 연인과 함께, 집보다는 휘황찬란한 길거리의 캐럴송이 더 익숙했었기에 당연히 미국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점이었다. 막상 뉴욕의 크리스마스는 조용했다. 실은 911 사태가 얼마 전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 오후 비행기로 원래 지내던 미시간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아침에 호텔에서 잠이 깨자 '무언가를 더 해야만 한다'는 막연한 욕심이 들었다. 원래 계획에는 호텔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었지만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외출 준비를 했다. 시간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현대미술관(MoMA)였다. 갈까 말까 고민했던 장소 중에 하나였는데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가기로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다녀온 MoMA는 여행의 기억에서 잊지 못할 장소가 되었고, 호텔 침대에서 평소의 나와 달리 다른 결정을 내렸던 과거의 내 모습에 대해 지금도 칭찬한다.
지금은 모든 것을 그야말로 정교하게 세팅할 수 있다. 별점 4.6짜리 카페에 가서 남들이 말하는 ‘인생 라떼’를 마시다가도, 10분 뒤에 도착할 버스를 타기 위해 5분 전에 정리해서 나가면 된다. 그렇지만 항상 스마트폰 지도가 알려주는 길에 익숙하지는 않다 보니 가끔 잘못된 방향으로 가거나, 골목길에서 헤매는 경우가 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지나친 조바심이 생긴다. 지금 가지 않으면 15분 뒤에나 탈 수 있는데, 여기서 이러면 4시에 마지막 입장을 못할 수도 있는데, 예약한 식당에 늦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일생을 뒤흔들 만큼 큰일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마음이 썩 편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여행이란 이렇게 의외의 이벤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고 싶었지만 현지의 날씨 때문에 망치기도 하고, 원래 하려고 했던 액티비티가 안전 상의 이유로 일부만 할 수 있다던가 그런 것들을 만나는 상황 말이다. 계획된 일정을 빠짐없이 잘 소화하는 하루의 즐거움도 분명한데, 때론 계획 없이 여행지에서 현지인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은 욕심도 든다. 그저, 여행자로서 선택의 문제다.
그래서 조금은 느슨한 여행의 일정들을 짜기 시작해 보았다. 지난번 태안여행이 그랬다. 중요한 방문 장소는 정했는데,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중간에 들르기도 하고, 다음 날 일정을 당겨서 오늘 해버리기도 했었다. 이전 같으면 계획의 변경으로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 막상 아무 문제 없이 여행이 진행되는 것을 체험하며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살아가는 동안 언제 다시 방문할지 모르는 장소일지라도, 그중의 일부만 즐기다 가도 되도록, 또는 중간에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다면 다음의 스케줄을 포기하고라도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도록, 그런 여행의 방식을 찾아가 보고 싶다. 그저 나에게 언제든 원하는 만큼 여행할 기회와 시간, 돈이 주어진다면 여행이 지금보다는 덜 계획적으로 흘러갈 수 있게 설계하고 싶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계획대로, 의지대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쩌면 인생의 일부 구간(즉, 짧은 여행)이라도 ‘내가 의도한 대로, 설계한 방식으로' 안전하고 완전하게 지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욕심이 아닐까 싶다. 일종의 반대급부에서 오는 통제욕구가 아닐까. 계획된 질서 속에서 의외의 발견이 주는 즐거움을 소소하게 즐기고 싶은 욕심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