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함께 <태양의 서커스> 공연을 보았다. 어쩌다 보니 벌써 서너 번쯤 보게 되는 공식적(?) 가족 행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별로 관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재작년엔가 봤던 공연이 썩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이제 별다를 것이 없어 볼 만큼 봤다’ 싶은 결론을 내렸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연휴를 보내는 방법의 하나로 아내는 예매를 해 두었고, 본의 아니게 강제로 공연장이 있는 서울 잠실을 방문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이번에는 안 봤으면 후회했겠다 싶을 만큼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내 말로는 예전에 봤던 작품은 상당히 정적이고 차분했던 반면, 이번 작품은 흥겹고 활기찬 면이 가장 다른 점이었단다.
공연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대사도 거의 없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앞부분의 내용을 몰라도 그냥 즐겁게 무대 위의 서커스를 즐기면 된다. 배우들은 중간중간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앞 줄에 앉은 젊은 남자는 잠깐 동안 무대 위에서 함께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흔들어야 했다. 관중들의 편을 나눠 서로 다른 쪽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게 만들기도 한다.
공연 당일 그 시간에 모이기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던 타인들이 무대 위에 등장한 한 두 사람의 손짓 발짓에 따라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르는 경험은 여전히 놀랍게 느껴진다. 언젠가 <사피엔스>에서 이러한 호모 사피엔스만의 특징이 도시를 이루고 문화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신화나 종교, 돈, 국가와 같은 공통의 상상을 공유하기 때문에 인류가 대규모로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연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종교적, 국가적 수준의 대단함은 아니겠지만, 잠시 동안 사람들은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그리고 공연이 끝나는 대로 썰물 빠지듯이 자리를 떠나는 관객들은 그 순간 바로 다시 타인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쩐지 이번엔 그런 장면들을 관찰하는 순간이 더 흥미로웠다.
가슴을 졸이는 장면들이 정말 많았는데 “제발 이제 그만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분명히 연출된 장면이었겠지만 실수처럼 보여서 아찔한 모습을 보일 때면 아찔했다. 대체 어떻게 사람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고 - 아니 활보다 더 심하게 - 높이 뛰어오르고, 한 팔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예전에는 그런 놀라움의 연속에 감탄하며 ‘와 정말 대단하다, 멋지다’라는 감상들이 더 컸다. 실제로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고,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모습들이 서커스의 미덕이니까. 그러나 나는 이번 공연을 보며 배우들이 무대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그 어느 때보다 궁금해졌다.
단 몇 분 동안의 공연을 위해 수백 배는 더 들였을 노력이 그들의 군살 없는 근육에 쓰여 있었다. 전에는 근육의 멋진 모습이 감탄스러웠다면, 지금은 그런 근육이 만들어지기까지 훈련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이 보였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한 번에 되는 간단한 장면이 아니므로 분명 성공의 횟수보다 그렇지 않은 횟수가 훨씬 많았으리라. 그렇게 무대 뒤에서 공을 들였을 배우들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분주히 준비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뛰어다니는 무대 바깥의 스태프들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인 공연의 컨셉을 설계하고, 안전사고가 없도록 무대를 섬세하게 준비하고, 조명 하나하나까지 소중하게 챙겼을 그들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박수는 멋진 장면의 성공보다, 무대 위에서 실수 없이 행해질 수 있게 준비한 노고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몇 년 전인가, 팀에서 중요한 연말 발표를 맡은 적 있다. 당시 내가 리더를 맡고 있던 조직의 성과를 남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성과의 내용이야 뻔하고 듣는 사람은 별다른 재미가 없을 수도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좀 다르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고민 끝에 당시 하고 있던 업무의 특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면서, 무대 위의 주인공(제품)을 빛나게 하는 역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기에, 나는 우리의 일 자체를 ‘무대 뒤의 스태프’로 정의했었다. 그런 컨셉에 맞춰 동료들과 리더들 앞에서 발표한 기억이 났다.
2시간 정도의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어쩐지 다음 공연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무대 자체의 즐거움과는 별개로, 무대를 가능하게 만든 사람들의 세계라는 다른 즐길 거리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