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은 예측하기 어렵고, 나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내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를 알 수 없다. 다만 계절의 변화는 예상한 대로 어김없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도 어느새 찾아온 가을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색색들이 물든 가을 단풍도 찬서리 맞으며 어느새 낙엽으로 뒹군다. 겨울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날이 쌀쌀해지면 보온성이 뛰어난 옷을 꺼내 입는 것이 우선이다. 이처럼 계절에 맞게 달라져야 하는 많은 것들은 집 안에서도 소소한 변화를 불러온다.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옷장 안에 두었다가 꺼내 오는 애착 담요가 있다.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쓰던 것인데 살짝 촌스러운 맛이 있다. 집안 분위기를 생각해 몇 번이고 버릴까 했었음에도 그 기능이 너무 확고해서 살아남았다. 솔직히 나보다 아내가 더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이미 10월 중순부터 소파에 있었다. 소파 위에 앉으면 차가운 발끝부터 무릎을 덮기에 안성맞춤이다. 누웠을 때 온몸을 다 덮을 정도로 길이감도 좋다.
아, 차가운 발.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나는 손과 발이 매우 차다. 가끔 낯선 사람과 악수를 해야 할 때 상대의 손이 따뜻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차다. 발도 비슷하게 차지만 다행히 남과 발을 맞댈 일은 별로 없다. 어느 계절이고 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고, 겨울은 겨울대로 낭만이 있음에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겨울맞이 두 번째 아이템은 족욕기다. 전원을 넣으면 일정한 온도로 열을 올릴 수 있어서 소파에 앉으면 요 녀석에게 발을 쏙 넣어주고 그 따스함을 만끽한다. 유일한 단점은 소파에 누운 채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족욕기의 또 다른 기능으로 좌욕도 가능하다지만, 그렇게 써 본 적은 없다. 민망하기도 하거니와 굳이 그럴 상황이 별로 없기도 하다. 여름 동안 드레스룸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이미 11월이 시작되기 전부터 자리를 잡았다. 우리 집 가전 장비 중에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라서 나, 아내, 아들 모두 번갈아 가며 대기를 타는 때도 있다. 심지어 어떨 때는 남이 하고 있는데 자신이 필요하다며 나오라고 할 정도다.
다음 주부터 갑자기 추워진다기에 주말에 침대 이불을 모두 겨울용으로 교체했다.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 해야 하는 일 중에 제일 귀찮은 작업이다. 보통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매트리스 커버부터 시작하여 매트 커버, 겨울용 솜, 이불보까지 다 바꿔야 한다. 이걸 완수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불보에 겨울 솜을 합치려면 사방을 다 묶어줘야 하는데 영 성가신 일이다.
나를 특히 열받게 하는 건 이불보와 솜이 서로 연결되도록 끈을 묶는 작업이다. 보통 침대 크기에 맞춰 싱글, 퀸, 킹 등으로 - 그 사이에 슈퍼 사이즈라는 중간 단계들도 있지만 - 침구가 나오지 않나. 그런데 이걸 만드는 회사마다 이불보와 솜을 묶는 끈의 모양이나 위치가 제각각이다. 사각형의 맨 끝은 당연히 묶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문제는 중간 매듭의 위치가 맞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는 점이다. 매듭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자다가 솜이 이불과 분리되고 모양이 막 흐트러진다. 또한 개어 놨을 때 단정하게 각 잡힌 모양을 유지하려면 서로 떨어지지 않게 잘 잡아줘야 한다. 매듭을 묶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위치가 다르니 묶을 수가 없다! 이 작은 규격 차이가 왜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앞으로 치킨을 마릿수로 따지기 보다, 중량(무게)으로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대한 뉴스를 들었다. 그것도 좋지만, 솔직히 이불 끈 위치부터 먼저 규격화해줬으면 한다.
아침부터 아이 방과 안방 침대 이불을 모두 바꾸고 나니 한 시간 가까이 흘렀다. 귀찮고 힘은 들지만 기분이 좋은 건 역시 새로 간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잠을 청할 때다. 뽀득한 감촉이나 막 꺼낸 이불 특유의 향을 맡을 수 있는 건 잠깐 뿐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겨울맞이의 하이라이트는 겨울에 걸맞은 여러 장식품들을 꺼내 놓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엄청나게 보내진 않지만 그래도 ‘겨울’이라는 계절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최고봉은 크리스마스다. 아이가 어릴 땐 트리 하나 설치하는 것으로 갈음했었다. 눈에 딱 띄기도 하고 존재감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작은 소품부터 시작해서 여기저기 장소마다 ‘나야 나, 크리스마스 장식’이라는 티를 내도록 꾸미게 되었다. 이것저것 자리에 두다 보니 집 안이 다소 산만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겨울은 이렇게 해야 뭔가 제대로 보내는 기분이다.
올해도 결국 이렇게 또 겨울을 맞는다. 손발은 차가워도, 새 이불과 족욕기 덕분에 버틸 수는 있을 것 같다. 겨울은 천천히 집 안 풍경을 바꿔놓는다. 결국 이 모든 귀찮음을 견디고 나면, 겨울이 온 걸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