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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서관 갈래요

비움(bium)

by 대우

<Poem_Story>


#1.

지하철 남천역에 내려 수영구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종합선물세트다.

문 틈으로 잔디와 조경이 이쁜 주택, 색깔 다른 덩굴로 벽을 감싼 키 작은 빌라, 산 나무들이 엎드린 듯한 고급 주택, 조경 푸근한 식당이 선물 박스에 포장되어 있지.

주변에는 KBS 부산 방송국, 적벽돌이 보이는 규큰 남천성당, 이해인 수녀님 숨결도 있고, 부산시장 관사를 리모델링한 숲 속 전시카페 '도모헌'도 있다.

남치이 인문학 거리엔 시가 있고 새가 우는 건 기본이다.

봄에는 벚꽃비 날리고, 여름에는 거리, 빌라, 주택마다 풀과 나무에 푸르름이 진동하고,

가을에는 뭇 잎들이 떨어져 가을비라도 내려 흩어질 때 사무침은 극치지.

겨울엔 찬바람, 스산함도 포용하는 윤회(輪回)의 기다림도 있다.

그래서 도서관 가는 길은 김밥 싸서 소풍 가는 길.


#2.

오늘도 만석이구나.

인연좋게 막 자리를 뜬 빈좌석에 가방을 풀었다.

도서관에서 매주 수고스럽게 선정해 놓은 책과 SNS로 추천받은 책을 고른다.

도서관 서고에 저장된 책은 때론 이쁜 옷으로, 다양한 액세서리로 다가오고, 답답하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등댓불도 되어주지.


#3.

도서관 1층 '카페 수'에는 팔뚝 문신이 귀여운 친절한 청년 바리스타가 근무한다.

눈웃음 주면 알아서 카페라테를 정성스럽게 우려 준다. 우유크림으로 하트, 청단풍나뭇잎도 만들어 주지.

집에서 싸 온 채소과일 도시락, 대여한 책을 들고 야외 쉼터로 간다.

꽃샘추위에 야외쉼터는 허옇게 주눅 들어있다.

헐벗은 블루엔젤, 조팝나무, 왕벚나무, 배롱나무, 청단풍나무 옷을 입혀주자.

나도 나무도 모두 비웠다. 아니 비워냈다. 비워지지 않으면 채울 수 없기에.

그래서 수영도서관 야외쉼터 이름을 비움(bium)이라 정했나 보다. 이름 참 곱다.





<우리 도서관 갈래요 _ 비움(bium)>


수영강 터널 뚫고 갈매기 울음이 기적(汽笛)처럼 들어온다

지하철 한켠에 어깨 부딪친 인연들이 전선줄 참새처럼 줄지어 앉아 있네

백팩 멘 참새도 빈 줄에 비집고 앉았네

공기가 무겁고 침묵도 까칠하네

우리끼리 말 없어도 서로를 의지하며 이 세상 살아감을 우리는 안다.


지하철 남천역 출구 앞에 고양이 분양 샵이 있다

얼마 전 딸이 독립하며 데려간 검은고양이 '바미'를 그리워하다 습관 된 서성거림

곁에 있을 때 희미해졌다 떠나면 점점 굵어지는 게 그리움이라지

봄비와 늦바람이 데려간 4월 벚꽃이 그리운 것처럼.


직선 지름길은 빨리 도착하나 가끔 싱겁지, 남치이 인문학 거리로 둘러서 걸어보자.

이해인, 유치환, 정호승, 김소월 님이 곱게 써 내려간 운문이 있고,

출발과 끝은 잎 비워낸 왕벚나무들이 파수꾼 된 거리,

우뚝 선 적벽의 건물도 길거리 자존심을 지켜주니,

'어울리지 않는 부부'란 문패 단 집, 프로이트를 연구하는 철학의 집,

젊은 주부들이 잘 볶은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는 거리도 되었지.


용케 찾아낸 도서관 자리하나 내 자리되었네

생명 없는 공간도 내 인연 되어야 잡을 수 있다는... 개똥철학

백팩 벗은 등짝 땀 식어 착잡하네

텀블러 들고 'cafe 수' 오아시스 찾아 가는 길

타투 새긴 바리스타에 눈웃음 주니

드르륵드르륵 추... 이... 익 우유크림 하트 새긴 카페라테 안겨주네.


채소과일도시락 들고 야외쉼터로 아점 먹으러 나가자

꽃샘추위에 허옇게 주눅 든 블루엔젤, 배롱나무, 왕벚나무, 청단풍나무 안녕

숱한 나날을 이별한 까치와 참새도 안녕...

도시락 비워내고, 나무도 비워내고, 나도 비워내니

도서관 오는 길은 비움(bium) 하러 오는 날

비워낸 자리에 또 내일 채워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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