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지쳐 벼랑 끝에선 우리가 우리에게
오래만이라 반갑긴 하지만 그렇게 반갑지도 않았다.
친구는 연락도 받지 않았고, 만난 지 몇 년이 지난 것을 만회하려는 듯, 텐션이 깃든 톤 높은 목소리에 부드러움까지 참기름처럼 묻어 있다.
"친구야 오랜만이야 내 딸 결혼해."
"와 줄 수 있지, 그동안 연락도 못했는데 부담 주는 거 아냐."
"네가 와줘서 축하해 주면 좋겠어, 친구들 중에 네가 가장 행복해 보이니, 네가 와주면 내 딸도 네 행복의 기운을 받아 잘 살 것 같아 부탁해..."
겸연쩍으면서도 거절할 수 없는 힘을 넣은 그의 말에,
"무슨 부담이야, 축하해... 그 꼬맹이가 커서 결혼해"
"그래 꼭 가보께... 축하해, 내가 가서 축하해 주면 잘 살 거야 걱정 마. "
친구 딸의 결혼식은 성대했지. 코로나19 지난 뒤라 하객들도 제법 붐볐다.
친구에게 눈도장을 찍고 피로연 장소인 식당으로 향했다.
컨베이어벨트에 올라 처분의 순서를 기다리는 상품처럼, 하객들에 등 떠밀려 먹는 뷔페 음식이지만,
다양하게 마음대로 먹으니, 오랜만에 배 터지게 먹고 단순히 행복했다.
남항대교, 부산항대교, 광안대교를 걸쳐 바다 위로 오는 귀가 길은, 토목공학의 대단함과 아름다운 풍광에 감사했고, 소중한 일과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는 길이 행복한데,
얼마 전 술을 만취한 상태로 치가 떨리는 높이의 대교 위에서, 신고 있던 신발과 우리 나이처럼 오래된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사업 실패로 채무에 시달려 하늘나라로 먼저 간 회사 입사 동기 김 00가 생각났다.
송도에서 해운대까지 치가 떨리는 그런 높이의 다리 위를 지나오며, 벼랑 끝에 선 또 다른 삶도 있었으므로 겸손해지기도 한 하루였다.
누구나 삶의 벼랑 끝은 있다.
<집으로 가는 길>
이 길이 내 길인가
조명 없어 캄캄한 터널이 내 길인줄 알았지.
가다 보니 터널은 짧았고
햇살 비추는 길이 더 깊고 넓었어.
멈춰서려 했었던 깜깜한 순간이 선뜻 무서워져.
삶은 롤러코스트지
짧고 어둡다고 낙담했다간 더 길고 따사로운 내일을 보지 못할 수 있지.
그늘과 어둠에 잠시 가려져 앞이 안보였을 뿐인데
누구는 그 높은 대교 위에서
누구는 코발트빛 밑그림이 보이는 해안 절벽 위에서
몹시 부는 바람 맞으며 술이 취하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서있었겠지.
조수석에 동승한 시간과 함께 광안대교를 지나고
조명은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하니
내 삶도 다이아몬드처럼 빛날 것 같은 생애 가장 빛나는 오늘을
우리는 달리고 있는 거야
제발 기억해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