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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 Dec 06. 2023

며느리로서의 고찰, 혹은 단상이라 해두자

가족모임에 음식을 도와주러 일찍 오라고 하신 것에서부터 시작

며느리가 되면서 갑작스러운 프레임 안에 스스로 들어가 갇히게 된 케이스가 바로 나다.

소위 말하는 ‘든든하고 좋은 며느리’ 혹은 ‘사랑받는 며느리’의 프레임이다.

마치 어릴 때 ‘착한 어린이’라는 타이틀이 좋아서,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어른들이 원하는 ‘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스스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원하는 것들을 숨긴 채,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슬그머니 전환하던 것과 비슷하다. 항상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보이는 것들을 원하는 ‘척’ 하곤 했다.

점점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성격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하는 방식을 잊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전형적인 K-장녀였다.

아버지는 술 한잔 하시면 ‘장녀!! 이리 와서 앉아봐라!!’ 하시면서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불러 부모님이 모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될 경우(?) 동생들은 하늘아래 의지할 곳이 큰언니/큰누나 하나밖에 없으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느니, 첫째로써 엄마 아빠를 많이 도와줘야 된다느니 그런 훈계를 늘어놓으셨고, 어머니는 나를 집안일 총괄책임자로, 동생들을 케어하고 관리하는 중간관리자로 만드셨다.

제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혹독한 잔소리와 체벌이 항상 뒤따랐으며, 나는 혼나는 것이 무서웠다.

타고난 성향이 얌전히 말 잘 듣고 잘 배우는 학생이었기에 부모님이 편하고 좋아하는 방식의 대부분을 빠르게 습득해 나가고, 상사의 눈치를 안 보는 듯 볼 수 있는 능력을 일찍부터 터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굉장히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 또 상사나 임직원들로부터 사랑받는 - 소위 '일 잘하는 데다가 성격도 괄괄한 만능 일꾼'으로 성장하였다.

도움은 분명히 된 것 같으나 그 부작용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현대인이 감기처럼 흔하게 앓는다는 우울증 혹은 조울증, 그리고 분노조절장애.

내 마음은 항상 헛헛했다.


경험이 쌓이면서 그렇게 나이가 들면 더 여유로워지고 자신감이 넘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점점 알 수 없어졌다.

나의 감정이나 욕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항상 상대방에게 맞추다 보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어가는 회피성의 상황들만 늘어났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눈치만 더 많이 보게 되고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척 연기해야 해서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친구나 애인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 뭔지 몰라 괜한 말다툼이나 파악이 어려운 애매한 기류의 갈등이 잦아지곤 했다.

갈수록 마음속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답답하고 힘들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알고 싶은데 알 길이 없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한 적이 없었으며, 나에 대해 알려면 어떤 생각과 고민의 단계들을 어떻게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하는지를 배운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혼자서.

마음을 터놓는 친구들은 있었으나 다들 나와 다를 바 없이 스트레스 많이 받는 바쁜 직장인들이었고,

또 괜히 스트레스를 더 주고 싶지 않은 배려심에(?) 이런 마음들을 쏟아내기가 더 미안했다.

항상 그런 부분들이 나는 좀 미안했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게.

그런 행위가 상대방에게 부담 주는 거 같고 배려 없어 보였다.

이것 역시도 아마 내가 일방적으로 감정쓰레기통으로서의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금요일 저녁에 퇴근한 후 내가 좋아하는 돼지껍데기나 닭발을 사 와 보상 같은 혼술을 시작하였다.

소주 한 병에서 한 두어 잔을 남긴 채 잠이 들고, 토요일 느지막하게 일어나 치우다가 남은 소주를 마시고, 그러다 이대로 끝내면 아쉬우니 또 새로운 병을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깜깜한 밤이거나 일요일 새벽이다. 그러면 또 허기져서 남은 걸 먹고, 먹다 보면 한 병을 또 까서 먹고..

그렇게 무한 반복하면 주말이 언제 있었냐는 듯 훅 가버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어 힘겹게 출근하곤 했다.

그렇게 한 두어 달을 살았던 것 같다.

점점 사는 게 무의미해지고 희로애락이 없어졌다. 

금요일을 시작으로 주말 동안 그렇게 죽은 듯이 술 먹는 것만 기다리며 살았다.

문득 강남순환도로를 멍하게 운전하다가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괜찮겠다는 - 그냥 이대로 사고가 나서 죽어버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왔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성의 없이 살고 있는 나를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때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급하게 검색하여 제일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무엇 때문에 힘든 것 같은지 이야기하고, 내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어주던 선생님은 약을 몇 알 처방해 주셨고, 나는 그 약을 먹었다.

그렇게 비틀비틀 아슬아슬 20대 중후반에서 30대를 넘기면서 살아냈다.


지금도 궁금하다.

왜 나는 그런 시기를 겪어야 했을까?

근데 왜 나는 아직도 남의 눈치를 볼까? 왜 다른 사람이 나보다 우선시가 되는 걸까?

타고난 선천적인 성향인 걸까 후천적 학습과 생존본능에 충실했던 습득인 걸까?

왜 다른 형제들이 아닌 첫째인 나만, 생존을 위해 습득했던 걸까?

왜 나는 엄마 아빠의 나에 대한 실망과 체벌이 무섭고 두려웠던 걸까?




곧 있을 할아버지 추도식에 시댁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점심을 먹는데, 좀 일찍 와서 도와달라는 전화에 갑자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혼인신고를 한지는 1년 하고도 서너 달, 결혼식을 한지는 만 1년 하고도 딱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남편과 시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이사하고, 가까이 살면서 며느리 역할에 충실하였다.

시부모님 회사에 직원으로 일하다가 1년을 채우고는 지난달에 퇴사하였다.

참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경우에서 의견이 있어도 생각이 없는 척,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는 척,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척하며 말 그대로 나를 철저히 죽이고 숨죽이듯 지냈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결혼함과 동시에 ‘나’를 버리고 그저 '아내'와 '며느리'로 너무 열심히 살았나 보다.

남편을 사랑해서, 그래서 남편의 가족들도 사랑하려고 마음으로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나 다른 누군가가 강요하지도, 혹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르륵 또 그렇게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물쇠로 입구를 잠근채 스스로를 가두고는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


나는 내 바운더리가 정말 정말 중요한 사람인데, 시댁 식구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한없이 작아졌다.

집을 도와주시고, 고용주인 시부모님으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성큼성큼 개의치 않고 내 울타리 안으로 마구 부수고 들어와도 그냥 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쭈욱 이어져온 내가 살아가는 패턴인 것 같다. 

내 부모님도 항상 나에게 얼마나 두 분이 돈을 힘들게 벌며 우리 넷을 키웠는지를, 그래서 보상받고 싶어 하심을 가감 없이 드러내셨기 때문에 조건 없는 금전적 베풂(?)에는 뭔가 떳떳하지 못한 자세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독립적으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살아가려고 급하게 고시원에 들어가 지내거나 서울에서도 긴 시간 발품을 팔아 월세 25만 원짜리 방을 구해 아껴가며 살기도 했었다.


그동안 많이 좋아지고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니 다시 원점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뼛속 깊이 새겨졌는지 난 또 도움받은 것에 대한 기대와 보상을, 원하지 않은 빚을 진 채로 스스로 열심히도 갚아나가려 했다. 

그렇게 '말 잘 듣는 며느리'로 1여 년을 묵묵히 지내면서 상처받고, 상처받은 곳이 곪아터지고, 나는 매일 샤워기를 틀어놓고 혼자 울부짖었다.

그리고 다행히 상담도 받고 남편과 많은 대화를 하는 등 도움을 받아 내가 잠근 자물쇠를 열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무사히 퇴사도 진행하였다. 

지금도 매일 노력하고 연습하며 마음을 단단히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그렇게 별안간 각성한 후로는(?) 갑자기 한순간에 내가 변하거나 싸가지 없어진 것(?)처럼 되어버렸다.

('싸가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또 많아질 것 같아 따로 다음 편에 써봐야겠다!)


며느리는 일꾼이 아니다.

며느리가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 모였을 때 함께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돕는 것은 좋은 것이다.

특히 모두가 함께 먹는 음식을 여럿이서 분담하여하거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 힘든 일을 혼자가 아닌 많은 이들이 거들어준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다. 


아직까지 나는 며느리라는 역할을 배워나가고 또 그것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아직 정립이 필요한 단계라 혼란스러울 때도 많지만, 이번에는 가서 도와드릴 거다. 사실 도움이 필요하실 땐 언제든 도와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여자라서, 그저 '일 잘하는 며느리'라서 음식을 할 때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과 또 당신의 아들은 남자라서, 혹은 손이 야물지 못하니 도움이 필요한 일에서 제외되는 것이 ‘당연시’ 되는 것은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셨으면 한다. ('일 못하는 며느리' 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사위가 귀한 백년손님이듯 며느리도 사실은 아주 귀한 손님이다.

당연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일꾼이나 종이 아니다. 

(*최근에 새로 며느리가 된 친구의 친구가 스스로 며느리를 '종년'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었다)

당연하게 일을 도와야 하는 '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남의 집 귀한 딸내미가 당신의 아들과 결혼해서 며느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한순간에 당연하게 오라면 오고 하라면 뭐든 해야 하는 하급자의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 것일까?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며느리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에서 당연한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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