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영씨 Mar 17. 2017

기다림의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

기다릴 줄 아는 자, 승무원이 되다.

꿈에 그리던 직장에 최종 합격까지 하고 10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면?  아니, 출근 날짜도 몰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면?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 암담한 상황이 나에게도 찾아왔었다. 2009년 4번에 걸쳐 테스트, 인터뷰를 통과하고, 최종 합격의 결과를 받은 날. 이제부터 행복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내일이면 당장 크루즈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할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도 기다리던 EMPLOYEE OF THE LETTER(LOE)가 발급이 안 되는 것이다. LOE는 승무원이 승선을 하기 전에 받는 크루즈 승무원 확인, 증명서로, 이 증명서에서는 승선하는 날짜, 승선하는 선박, 하선하는 날짜가 기재되어 있다. 이 증명서가 있어야지 만이, 내가 크루즈 승무원임을 증명하고, 입, 출국을 할 수 있으며, 부두 출입이 가능해지며, 승선을 할 수 있다.


기껏 종이 한장인 이 녀석이 승선시 없어선 안될 존재라는거. LOE에는 개인 정보(성명, 여권번호, 국가, 포지션 등) 및 승선일, 하선일, 승선하는 선박명 등이 기재되어있다.


최종 합격 후,  처음 한 달은 짐을 꾸리고, 친구들, 교수님, 가족들과 작별 인사한다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달째에는 혹시나 빠진 건 없는지, 싸놓았던 짐을 점검하고,  전 세계를 항해하며 다닐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그리며 세계지도를 보며 하루하루 행복해했고, 아르바이트도 그만둔 상황에서 되도록 많은 시간을 영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석 달째가 되니, 점점 불안해졌다.  이미 작별인사를 한 친구들도 하나 둘 “니 언제 배 타노! 배 타기는 타나! (부산의 거친 억양, 고기잡이 배를 타야 할 것 같은 무서운 억양) " 며 물어오기 시작했고, 부모님도 혹시나 나의 승선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혹시 입사를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셨다. 난 애써 태연한 척  ‘응, 곧 출국할 거다. 서류 작업이 늦어지나 보다’  라며 말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불안하며 초조하게 기다린 사람은 나였다. 넉 달째가 되자, 점점 지쳐왔다. 채용대행사에서도 몇 번씩이고 본사에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승선 날짜는 확정 나지 않았고, 돌아오는 건 조금만 기다려 보자는 위로의 말뿐이었다. 같이 최종 합격했던 사람들 중에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회사의 취업준비를 시작하는 등 하나 둘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같이 스터디를 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많은 이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우리가 가보게 되었다며 서로의 용기를 칭찬하고 격려해주었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승무원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취업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많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언젠가 승선할 거란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다 나 역시도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다리는 동안에 ‘경력이라도 쌓아야 혹시나(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시나리오였지만) 승무원이 못되어도 다른 곳을 지원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결론에 이르며,  단기 아르바이트 혹은 인턴쉽을 알아보던 중, 운이 좋게도 남해에 있는 한 골프&스파 리조트에서 F&B부서의 인턴으로 3개월간 근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부모님은 인턴쉽을 구해도 대도시로 안 가고, 남해냐며, 불만이 가득하셨지만, 난 오히려 바다를 매일 볼 수 있는 남해라서 더 좋았다. 더욱이 주변 사람들은 탄다는 크루즈는 안 타고, 섬에 가는 나를 이상하게 보기도 했고, 크루즈 승무원을 포기했는데, 부끄러워 남해로 도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난  왠지 이 길이 크루즈를 타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이며, 크루즈로 가는 항로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크루즈에서도 Assistant Waitress 로 근무하게 되었으니, 승선 전 호텔 F&B 에서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난 크루즈 승무원이 될 거니깐!”


인턴쉽으로 두 달째 근무하던 어느 날,  어느 때와 달리 그날의 근무는 이상하게도 순조롭게 지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날은 혼자 그늘집(골프장의 매점을 일컫는 말)에 근무하는 날이었는데,  유독 손님이 많았고, 앞 뒤 팀들의 속도도 안 맞아, 교통체증처럼 꽉 막히는 날이었다.  손님들도 그날따라 성적이 잘 안 나오는지, 하나같이 짜증 섞인 말투였고, 나 역시 그런 손님들을 연속해서 응대하다,  짜증이 나서 그만 불친절하게 응대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손님에게 큰 욕을 먹는 사태까지 와버렸다. 다른 직원과 교대근무를 하고, 백오피스로 가서 매니저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어찌나 서럽던지. 그만 눈물이 나서 길거리 한가운데서 펑펑 울었다. 가족, 친구들도 보고 싶었고, 잘하고 싶었지만  잘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컸다. 또 9개월째 연락 한통 안 오는 크루즈 회사도 너무 야속했고, 바보같이 무작정 기다리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으며, 이미 원하는 곳에 취업해서 근무 중인 친구들의 사진을 휴대폰에서  볼 때마다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인턴쉽도 끝나는데,  정직원이 된다고 해도 걱정, 안 되어도 걱정이었다. 도대체 뭐가 옳은 길인지, 승무원을 포기하고, 제대로 이 곳에서 정직원이 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메일 수신 알림이 떴다.  


“ 로열캐리비안 크루즈 승무원 출국 대기자 김나영 님 승선을 축하드립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도 안 가고,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메일을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보았지만, 정말 승선을 축하하는 글이었고, 그 후 한 달 뒤 난 10월 9일 내 인생의 첫 크루즈, LEGEND OFTHE SEAS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승선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최종 합격 후 이처럼 긴 기다림 없이 빠른 시간 내에 LOE를 받고 승선하는 승무원들도 많다. 이처럼 승선일이 각자 달라지는 이유는 크루즈 회사의 채용시스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크루즈 회사는 공채가 없고, 수시로 승무원을 채용한다. 수많은 승무원들이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 있으며, 본사의 스케줄러가 포지션 별로, 선박의 상황별로, 승무원 한 명 한 명의 스케줄을 관리한다. 만약 새로운 선박이 건조되어, 많은 수의 승무원이 한꺼번에 필요한 경우에는 합격 후 빠른 시간 내에 LOE를 받을 수 도 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Case by case 다 보니, 최종 합격을 하였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며 마음을 비우고, 또 성급하게 준비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당신은 승무원이 될 거니깐"

매거진의 이전글 바닷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