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테디베어와 같이
나는 나이를 먹어서도 애니메이션을 보고 게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그거 알아? 게임은 도박만큼이나 위험하고 안 좋은 거야!
아내가 나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내 취미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과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는 소위 말하는 덕후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보느라고 내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책임 없이 행동한 적이 없다. 게임을 하면서, 그 흔한 현질을 하지도 않았고, 게임도 아내 눈치를 보면서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평범한 부부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내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갔다. 아내는 "게임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것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봤다. 게임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 한심하게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난 그녀의 그런 눈길과 정신병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왜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나,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아? 마치 내가 결혼생활을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내가 나에게 자주 하던 이야기다. 맞다. 난 아내에게 내 감정을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 내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신혼 초, 내가 회사에서 팀장과의 불화로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나눴고, 처음엔 아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나의 하소연 횟수가 늘어나자 아내도 힘들었는지, 나에게 소리치듯이 이야기했다.
그만 좀 말해. 도대체 얼마나 더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바뀌는 것도 없고 말이야. 난 다른 사람과 달라서 감수성이 높아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힘들어진단 말이야. 그만 좀 해. 나도 힘들단 말이야.
아내의 말에 난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 정도로 하소연을 많이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회사일을 이야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아내가 상처받거나 나로 인해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내 앞에서 회사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씩 아내가 안부를 묻거나 했을 때, 내 이야기를 했다가 감수성 높은 아내가 힘들어하고, 나에게 가시 돋친 이야기를 하는 걸 겪으면서, 차라리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 가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입을 점점 더 닫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입을 닫을수록 아내는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나에게 쏟아냈다. 대학원에서 친구들과 다퉜던 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 유학생활의 고충 등을 말이다. 처음엔 그녀에게 조언이랍시고 내 생각을 나눴지만, 아내에게 핀잔만 듣고 싸운 게 수차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는 해답이 아닌 동감을 원했던 것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아내의 경우는 그 정도가 컸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있었고, 내가 그 반응을 하지 못하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포기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는 모습은 보질 못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노력은 했지만, 그녀의 성격상 포기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아내의 기분과 생각 알아채기에서 계속 낙제점을 맞으면서, 점점 나의 아픔과 생각은 꽁꽁 숨겨두고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마치, 배를 누르면 "I Love You"라고 자동으로 이야기하는 테디베어 곰인형과 같이 변해간 것이다.
내가 무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내가 원하는 리액션은 대입시험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었다. 회사나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해 보라 해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난 화가 나서 그녀와 싸움을 하면서 마무리를 짓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의 고민에 대해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라 면박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아내와의 대화는 점점 아내 혼자 독백하는 대화로 변해갔고, 난 그저 그녀의 이야기에 "그랬구나. 힘들었겠네. 그 친구는 왜 그랬을까"를 반복하는 감정이 없는 자동응답기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재미있게 이런 내 행동은 아내가 나와 이혼을 요구한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다. 난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답하면 화를 내고, 핀잔주고 무시하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또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다는 아내의 말에 정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내는 자신이 원하는 남편상이 있었고, 그 기준에 미달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점점 지쳐간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