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이것'이 있나요?
올해 참 많은 일을 저질렀고, 또 많은 일이 내게 닥쳐왔다. 내가 기억하는 굵직한 것들만 추려봐도 이 정도다.
요리 배우기
책 <나저씨의 이혼일기> 등 출간
개인전(Baby Step) 개최
후쿠오카 여행
리코 GR 4 구매 (결국 질렀다)
어머니 암 확진 및 투병 (ing......)
새 차 구매
브런치 구독자 400명 돌파
스페인어 수업
이 중 올해 내게 가장 큰 이벤트를 꼽으라면, 남들은 책 발간과 개인전 개최라고들 할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내가 퇴직하고 나서야 이뤄질 거라 막연히 꿈꿨던 일들인데, 내 예상을 뛰어넘어 너무나 일찍, 그것도 한꺼번에 이뤄져 버렸다.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커리어 하이'를 찍은 셈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과 개인전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내 삶에 영향을 준 사건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요리를 배운 것'이다.
요리를 배우게 된 계기는 정말 단순했다(그리고 좀 찌질했다). 나중에 퇴직하고 나서 돈도 못 버는데 밥까지 못 하면 진짜 굶어 죽을까 봐 겁이 나서였다. 생존 본능 하나로 연초에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처음엔 역시나 재능이 없었다. 칼질은 서툴고 간은 안 맞고....... 2주 차쯤 됐을 땐 진지하게 환불을 고민했다. 다행히 선생님의 열정적인 응원(거의 멱살 잡고 끌고 가주신 덕분)에 힘입어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요리학원을 수료한 후, 난 정말 미친 듯이 요리를 해 먹었다. 수육, 불고기, 어묵볶음, 냉제육, 제육볶음, 된장국, 김치찌개, 카레, 미역국, 오징어뭇국, 달래장, 등갈비찜, 파스타, 콩국수, 메밀국수.......
내가 요리를 할 때 가장 즐긴 시간은 바로 재료를 손질하고 불 앞에 서 있는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요리에 갓 지은 따뜻한 밥을 곁들여 먹을 때면, 헝클어졌던 내 정신이 조금씩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요리는 나에게 '정신적 쉼' 그 자체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브런치에서는 요리 이야기를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다. 나조차도 요리가 2025년의 내 삶을 이렇게나 지탱해주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까.
그러던 오늘, 삼겹살 숙주 볶음과 어묵볶음을 만드는데 갑자기 내 안에서 '행복과 편안함'이라는 감정이 훅 치고 올라왔다. 평소엔 그저 멜랑꼴리한 기분이라 생각하고 넘겼던 그 감정이, 사실은 내 영혼이 충족되는 느낌이었음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만든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는데,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것도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넷플릭스 드라마나 보고 있는데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평온함이다. 그 순간 생각했다. '아, 나 이전의 아픔에서 정말 많이 치유되었구나.'
요리는 올 한 해 내가 나를 위해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고 소소한 배움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위로와 충족감을 주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정말 세상에 덜 소중하고 덜 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혹시 지금 머리가 복잡하고 이유 모를 불안이 찾아온다면, 배달 앱 대신 냉장고를 열어 요리를 해보는 걸 추천한다. 식재료를 썰고, 볶고, 끓이며 변해가는 풍미를 맡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속 찌꺼기들이 요리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적을 맛보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