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사고를 가장한 필연
지하철을 잘못 탔다. 아침에 가려고 했던 장소와 반대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버린 것이다. 아니, 사실 방향은 제대로 탔는데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그 짧은 순간, 머리는 내리라고 하는데 몸이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실수인지 우연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결국 난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을 가지 못하게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 계속 생각만 했던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바로 서촌. 마침 지하철도 3호선이니 이 얼마나 기막힌 우연인가?! 이런 생각으로 서촌을 향해 이동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밖에 나오니 날씨가 매서웠다. 너무 추워서 괜히 서촌에 왔나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언제나 효율을 강조하던 나에게 이런 동선은 정말 비효율의 극치이다. 서촌에 와서 고작 30분 정도만 머물 수 있고, 다시 스페인어 수업을 위해 지하철을 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말 비효율의 극치이지만, 난 무엇에 홀린 듯이 경복궁역을 나와 가져온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차가운 공기, 앙상한 나뭇가지, 낡은 기와 같은 것들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사진의 구도나 피사체의 의미 등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셔터를 눌렀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남기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며 걷다가 ‘오버트 서촌’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몇 년 전까지 내가 자주 왔던 카페였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카페에 들어가 자주 마시던 커피를 주문했다. 지하로 내려왔는데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손님이 나 혼자였다. 혼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커피 향을 음미하면서 한 모금 마셨다.
추위에 떨어서였을까. 혀끝에 닿는 묵직한 쓴맛과 뒤이어 올라오는 은은한 산미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천천히 내려가자, 잔뜩 움츠러들었던 온몸의 긴장이 눈 녹듯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가져온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꺼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요즘 나는 효율을 1순위로 두는 생활을 했다. 밖에 나가고 싶어도 시간적, 재정적 효율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집에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말은 대부분 시간 낭비로 끝나기 일쑤였다. 밖에 돌아다니지 않다 보니 몸이 불편해지는 경험도 했다. 소화불량과 두통에 시달리고, 무기력증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상태가 지속되곤 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효율을 외치던 나는, 오늘 아침에도 효율을 따지며 먼저 세운 계획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지하철을 탄 순간 내 몸은 더 이상 뇌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뇌에서는 일어나서 움직이라고 미친 듯이 명령을 내렸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서촌에 오는 30여 분의 시간 동안 뇌는 계속 나에게 외쳤다. 이건 매우 비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머릿속의 외침이 맞다. 30분 이상 지하철을 타고 가서, 10분도 채 앉아있지 못할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30분 이상을 이동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 행동.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한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이 비효율이 나를 어느 곳으로 이끌지 말이다. 그래서 서촌에 왔고, 몸이 이끄는 대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걸어서 카페에 왔다. 평소에는 마시지 않는 비싼(?)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신 커피 한 모금은 아침에 내 머릿속 외침을 거부한 몸의 행동을 이해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건 비효율이 아니었다. 비효율이 아니라 바로 여유였다. 마음의 여유. 몇 주 동안 효율을 외치며 나 자신을 몰아세우면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불편했는데, 드디어 그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마음의 여유. 비효율이라 외치던 이 돌발행동은 바로 내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내가 30대에 얼마나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던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재정적, 시간적 효율보다 내 마음의 여유가 더 중요했기에, 단 10분을 위해 한 시간 넘는 시간을 썼던 사람인지 말이다. 지금 하는 스페인어, 그림 공부, 캘리그래피도 생각해 보면 모두 다 비효율의 극치인 것들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지금 내 삶에 당장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과 돈 낭비일 뿐인 이 모든 활동이 결국은 날 살리는 선택이었다.
이런 비효율적인 삶을 살던 내가 어느 순간 효율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진짜 효율적인 것이었을까? 효율을 외치며 선택한 행동들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더 큰 무기력과 낭비를 야기했다. 오늘 발생한 이 우연한 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필연적인 일이었고, 이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비효율적인 선택과 행동들이 사실 내 삶에서 가장 효율적인 치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 난 다음 약속에 쫓기듯이 커피를 원샷으로 마시고, 급하게 카페를 나선다. 앞으로 30분 이상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마음속엔 조급함이나 후회의 감정이 없다. 오히려 여유로움과 알 수 없는 행복감이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다. 앞으로는 비효율적인 선택을 좀 더 자주 하면서 살아가야겠다.
"여기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추가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