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분노-공포-[흥정]-수용
외로움에 대한 공포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내 마음속에 한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혼생활이 꼭 같이 살아야만 결혼 생활인가? 따로 살아도, 부부로서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꺼야.주위를 봐. 서로 떨어져 살고 일년에 몇 번 만나지 않는 사람들도, 다 행복하게 살자나. 너만 특이한게 아니니까, 너무 호들갑 떨지 말고, 그냥 살어.
이혼을 하지 않기 위한 스스로의 핑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하고,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아내도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우리 결혼생활에서 좋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난 그만 벽에 부딪히게 된다. 결혼 생활 중에 좋았던 기억이 생각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서로 싸우고, 소리를 지르며 살았다. 결혼 상담도 수차례 받았지만, 결국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혼 생활에 대한 현타가 오면서, 내 마음속에는 장점이 아닌 복수심에 불타는 또 다른 나 자신이 조용히 내 마음속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내는 지금 해외에 나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호의호식 하고 있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 해야하는 거야? 내가 유학비를 전부 다 지원하고, 한국에서 대학원 입시 준비도 다 지원해 줬는데, 그래서 난 지금 가진게 하나도 없는데, 왜 고통도 나만 받아야 하는 거지? 이렇게 끝낼수는 없어. 절대 이혼하지 않을꺼야? 끝까지 싸우고 내가 겪은 고통을 상대도 겪도록 만들꺼야
이런식의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을 보면, 둘 다 이혼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외로워지는게 무서워서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내 자신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 이혼에 대한 "흥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이혼은 피하고 싶은 생각이 커서, 내 자신과 흥정을 하였고, 아내와 흥정을 하려고 했다. 흥정이라는 단어가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스스로에게 이혼만이 답은 아닐꺼라 이야기 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내가 좀 더 참고 기다리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다시 함께 살자고 설득하려했다. 물론 먼 해외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메신저로 글을 보내거나 영상을 만들어 보내는 정도의 일을 했다. 물론, 처가의 부모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자기 딸 편만 들고, 아내가 해외로 가는 것을 뒤에서 지원해준 처가에 무언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혼 이야기가 나온 이후부터 그들의 입장은 명확했다. 아내의 아버지는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며 이 문제를 피했고, 아내의 어머니는 "자신도 딸을 포기했으니, 그냥 이혼 하라"는 이야기로 나를 설득하려했다. 나에 대한 그들의 흥정요소는 바로 "아직 젊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이혼해서,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였다. 날 생각해서 이혼하라니, 그들의 말이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나중에 알고보니, 앞에서는 나에게 감언이설로 이혼을 종용 하면서, 뒤에서는 자신의 딸이 외국에 나갈 수 있는 준비를 다 했던 것이다. 정말 허울 좋은 사람들이었다. 외부에서는 존경받는 사람에 교회 신도 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그저 발생한 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최대한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주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에대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아내가 외국에 있는 동안에도 모든 명절과 집안 대소사에 (혼자) 참석 하였고, 한 달에 2번 이상 처가에 가서 인사를 드리면서, 사위로서 "도리"를 다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참 바보에 호구였다.)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아내와 나의 관계는 누가 봐도 이혼하는게 이상하지 않을 상황까지 치달았다. 주위에서 우리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이혼하라 충고했지만, 내가 이혼을 선택하는데까지는 합의이혼을 거부한 뒤로 약 일년정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스스로 이혼을 하지 않아야 하는 합리화(흥정) 때문이었다. 나의 흥정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왔다. 현실 회피와 거부, 외로움에 대한 공포, 미래에 대한 (거짓된) 기대 등... 하지만, 내부적인 흥정과 회유에도 언제나 도출되는 결론은 "이혼"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 쪽에서 대화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아내는 (나의 지원에 힘 입어), 해외에서 유명 대학원을 졸업하여, 지금은 해외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비자(내 돈과 다른 외적인 지원을 받아)를 발급 받아서, 프리랜서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한국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게 한심하기도 했다.
계속 이렇게 건강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나 자신(무의식)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느날 잠에서 깼는데,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이혼은 피할 수 없는건데, 상대는 해외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나만 한국에서 불행하게 사는 건, 상대에게 지는 것이야. 그러니까, 행복하자! 그게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인거니까! 그러니까, 이혼하자! 이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자!
그리고, 그 때 했던 나 자신과의 흥정은 제대로 먹혀들어갔고, 그렇게 조정이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흥정 때문에 이혼이 지연 되었지만, 흥정 때문에 이혼 수속이 시작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