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대훈 Nov 11. 2023

95

11.11

산책 


밤은 작았다. 작고 답답한 밤에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집에서 벗어나자 새로운 집이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어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단아한 편의점과 덤덤한 소방서를 지나 강가로 갔다. 인적 드문 강가에서 나는 쓸쓸함을 등에 지고 정처 없이 걸었다. 구원이나 자유 같은 단어는 떠올리지 않았다.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는 지경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강 쪽으로 기울어뜨리고 길을 따라 나아갔다. 강물은 며칠 전에 본 것과 유사했지만 엄연히 달랐다. 나는 날마다 새롭게 흐르는 강물을 동경하고 질투했다. 고독과 고독을 연결하다 보면 물을 흉내 낼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걷기로 했다. 남몰래 저지른 오류를 반성하며 걷는 동안 쓸쓸한 쾌감이 심부를 열어젖혔다. 자꾸 헛것이 보이고 헛것 너머의 것도 보였다. 내 의식은 한 겹 분리되어 허공으로 훨훨 날아갔다. 나는 조금 더 과묵하고 빈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이것이 경이로웠다.  


강은 가볍고 잔잔하게 일렁였다. 강의 반대편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연기는 강물과 뒤섞여 신령하게 굽이쳤다. 나는 징검다리에 올라 강 반대편으로 갔다. 가까이서 보니 연기와 강물은 더 기이하고 강렬했다. 나는 그 연기를 코로 빨아들이고 싶었지만 연기는 물에 착 들러붙어 내가 밟은 땅으로는 도무지 올라올 기색이 없어 보였다. 때로는 만질 수 없는 것도 어딘가 머물며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모양이다. 연기와 물이 수런거리는 표면 위로 가로등 불빛이 뒤섞여 빛났다. 별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시야를 돌리니 저쪽 강에서는 물 위로 지상의 빛과 건물들의 표면이 일그러져 있었다. 지상의 빛과 건물들은 물의 흐름에 따라 물 위에서 흐느적거렸다. 물 위에서 빛은 가늘고 길었고, 건물들의 면적은 넓었다. 강은 즐겁고 단란해 보였다.  


강 위에서 나의 순간들은 뿌옇게 풀어졌다. 풀어진 순간들은 강 위에 잔영으로 남아 걷는 내내 잔잔히 출렁였다. 강가를 걷는 동안 시간은 누군가 고의로 밀어낸 듯 지나있었다. 흐릿했던 시야의 장막이 일순 걷히기 시작했다. 위태롭고 불확실한 것이 너른 공명을 이루며 다가왔다. 나는 혼탁한 교란과 삼엄한 유랑의 순간을 지나 조금씩 맑게 응집된 회복의 여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물이 될 수는 없었지만 어느덧 강이 내 생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돌아가는 밤하늘에는 별이 빛났다. 별은 깨끗했다. 

작가의 이전글 9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