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하나, 커다란 백팩이 등에 하나, 작은 가방이 가슴팍에 하나, 육중한 고양이가 든 캔넬 하나,
그리고 당혹감에 진땀을 흘리는 사람이 하나.
이것이 바로 고양이를 데리고 스페인으로 떠났는데 집주인과 연락이 엇갈리면 당신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하는 아침부터 연락을 시작해서 계속해 문자를 보냈으나 집주인은 답이 없었다. 분명 영어를 조금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기차 안에서 겨우 닿은 통화는 엄청나게 먼 통화감과 더불어 소음이 목소리보다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더불어 소음만큼이나 걸걸한 목소리는 화가 많이 난 할머니를 연상시켰는데 어느 면으로 보나 미덥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짐을 들고 집 문 앞에 서 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바보처럼 전화기에 대고 같은 말만 반복하며 '스페인어로 문이 뭐였지?''도착은 뭐였더라?''지금이라도 호텔을 알아봐야 하나?' 등의 생각을 마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는 속도로 하고 있을 때
이렇게 커다란 고양이를 데리고 나앉게 되는 건가
"Hey, can I help you?(저기, 도와드릴까요?)"
라는 말이 들려왔다.
무려 영어였다.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뒤돌아 본 곳에는 아주 선한 눈을 가진 현지인이 서 있었다. 외모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래도 아주 무섭고 험악하게 생긴 사람보다는 친절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수화기를 건네주고, 이제 모든 것이 쉽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전화를 건네받은 남자의 표정은 점점 더 이상해져 갔다. 표정이 고구마 먹다 목 막혔는데 앞에서 밤까주는 사람을 보는 표정이랄까. 심지어 나 또한 집주인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문만 열어주면 되지 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고도 한참 후 남자가 전해준 말은 이랬다.
하늘은 맑고 집주인은 문을 안 연다.
"집주인이 자기는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여행 중이며(뭐라고?) 집주인이 자신이 자기 집의 위치를 알고 있음에 분노했으며(네?) 계속해서 닥치라고 소리 지르는데(네?) 이 사람 괜찮은 건가요?"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요? 왜요? 그래서 언제 온다는 거죠? 호텔이라도 잡아야 하는데요."
한참의 통화와 한참의 통역. 그러고 나서 나온 결론이 더 가관이었다.
"내일 온댔어요."
"내일이요?"
너무 당황하면 호텔과 택시 중 어디를 먼저 연락해야 하는지도 순간 헷갈린다.
내일이요?라고 되묻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분명 중계 수수료를 내고 웹사이트를 통해서 집주인을 구했으며 집주인에게 보내는 메일이(나의 인적사항, 도착 날짜 등) 반송되고 있으니 확인해 달라고 웹사이트에 2번의 메일을 보내 놓은 상태였다. 조금 더 확실히 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겠으나 한국인이 참을 수 없는 일처리 속도를 지닌 웹사이트에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후에 간단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해 두 달간 고생하게 해서 '니네가 한 게 뭐냐. 수수료 내놔라'라고 환불받은 건 다시 얘기하겠다.)
난감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제 이름은 데니예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 머물러도 좋아요. 저는 가족들이랑 바로 이 앞에 살거든요."
얼마 후엔 이렇게 아름다운 축제가 벌어지는 거리였지만, 당시의 나에겐 절망스럽기만 했다.
나는 낯선 사람의 집에 가는 것과 이박삼일 간 쌓인 여독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건 절대 낯선 사람의 호의에 함부로 응해도 된다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좋은 사람으로 보였고 그의 집이 바로 맞은편이었으며 가족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해도 위험한 것은 위험한 것이다.
고민끝에 가족과 살고 바로 앞이라는 얘기에 가게 된 그의 집은 유럽의 여느 집들이 그렇듯이 좁았고 불빛은 어두웠다. 일을 하러 간 그의 아내를 제외하고도 사랑스러운 두 명의 처제들이 있었다. 말은 안 통해도 웃음이 사랑스러운 처제들이었는데 베소스(vesos : 양볼에 입 맞추는 인사)를 처음 해 본 사람들이기도 했다.
나는 남는 침대에서 잘 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온두라스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남미 사람들 답게 몹시 쾌활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대화했는데 미란이는 그 쾌활함을 피해 구석으로 숨었다. 다들 동물을 좋아해서 커다란 목소리로 환영해 줬지만 남미 고양이들은 다 큰 목소리에 적응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고양이를 겁먹게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잠시간 얘기하다가 다들 일을 하러 갔고 나에겐 편히 쉬고 있으라고 했다. 요양보호사와 웨이터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처제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데니를 통해 몇 마디 주고받으 수는 있었다. 나는 한쪽 구석에 아주 작게 붙어있는 욕조에서 샤워를 했는데 샤워커튼을 치니 더욱더 좁게 느껴지는 욕실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한 문제는 기다려도 찬 물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집은 찬물과 더운물이 반대로 설치되어있었다. 그때 당시의 나는 이리저리 돌려볼 생각을 못해 그냥 찬물로 씻어야 했다. 말 그대로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한 여름에도 적어도 미지근한 물로 씻는데 추운 날씨에 그런 곤욕도 없었기 때문에 샤워는 빠르게 끝났다.
나는 잠시 나가서 사온 치킨 샌드위치를 먹고(처제 중 한 명이 커다란 핑크색 폼이 달린 귀여운 열쇠를 줘서 나갔다 왔다. 바로 옆집이니 짐 옮기고 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뭔가 들고 튀면 어쩌려고'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잠자리를 둘러봤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구석에서 나온 모란이는 귀와 꼬리를 잔뜩 내린 채로 불만스럽게 정찰하고 다녔다. 나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너무 커다란 공간에 놓는 것보다 적응이 쉬울 것이었다. 좀 추웠던 날씨는 밤이 되자 견딜 수 없이 추워졌다. 처제 중에 추위를 안 타는 쪽의 방을 내어준 듯 이불도 얇았다. 그래도 남의 집이라 그냥 잘까 하다가 전기장판을 꺼내 깔았다. 한국사람 기준으로 입 돌아갈 것 같은 추위였다. 부르르 떨면서 들어간 침대 속으로 마침 추웠던 고양이도 같이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고양이를 옆구리에 안고 불안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긴장한 상태로 파파고와 구글번역기를 사용해 메세지를 주고받으며 집주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가 고맙다는 메모와 함께 50유로를 테이블 위에 남겨놓고 나온 것은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다시 어두워진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