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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성 Dec 03. 2019

이룬-산세바스티안-자라우츠

2019. 10. 11. ~ 10. 12.

누군가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아마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내가 부시럭거리거나 남이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아침의 시작일 것이다. 핸드폰 알람소리 대신 사람의 기척으로 잠을 깬다는 게 약간 생소하다. 정신도 들기 전에 부담스럽게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남들 틈에 세수를 한다. 화장실과 세면장이 같이 있는 곳에서는 이 시간에 남의 배설물 냄새도 맡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거슬린다. 기상 직후에는 조용히, 적어도 커피를 한 잔 하기 전에는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한마디로, 아침이 즐겁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도 이랬었나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났다. 까미노 프랑세스의  만하린을 지난 뒤 다음 마을이었다.  제법 큰 알베르게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날 밤 와인도 나누어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독일인 중년 남자가 다음날 아침 얼굴을 잔뜩 찌푸린채 인스턴트 커피를 진하게 타서 마시고 있었다. 난 그에게 하우아유라고 물었고, 그는 아침에 커피 마시기 전에는 기분이 몹시 안좋아라고 답했다. 답은 이것이었지만 좀 꺼져줄래, 하는 뉘앙스였다. 그렇단 말이지. 난 그에게 쏘리투톡투유라고 살짝 비꼬듯이 말했는데, 내 일행 중 한명이 내 이름을 달래듯 부르며 내가 예의없이 행동한 것임을 암시했다. 그 독일인은 좀 멋적은듯 웃고 자기 커피로 돌아갔다. 그러고보면 적어도 저 때, 2007년에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내 기분이 괜찮고 몸에 활기가 돌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삼사년 정도 지나서 내가 그 독일인 나이 정도 되면 아침에 커피 마시기 전에는 기분이 몹시 안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룬에서 산비탈을 조금만 오르면 마을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다.  반대편으로 바다도 보인다. 새파란 바다와 푸르른 초목들이 잘 대조를 이룬다. 순한 말들이 다가와서 대화를 걸듯이 고개를 비쭉 내민다. 오른편으로는 바다, 왼편으로는 이룬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높지 않은 경사와 야트막한 평원을 반나절 지난다. 점심때쯤 도착하는 작은 마을 파사헤스도 매력적이다. 햇볕을 받은 건물들 색이 선명했고, 바다를 내다보며 늘어서있는 식당들도 하나같이 활력이 넘친다. 빅토르 위고가 사랑한 마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을 떠나면서 바라볼 수 있는 바다는 또한 박력이 넘친다.





산세바스티안에 못미쳐, 도세 트리부스라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차가운 레몬마테차와 쿠키를 먹었다. 끝내줬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열두부족을 딴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공동체에 편견을 갖고 있지만, 그곳에서 내주는 차와 과자가 맛있으면 그 편견이 약간 사라진다.  보통 그런 공동체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경관이 좋고, 마당도 잘 가꾸어져있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지상의 삶도 열심인 것이다.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차 한잔 마시고 지나가는 사람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들도 굳이 이해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독일인 사비나와 작별을 했다. 그녀는 소셜워커인데, 운좋게 1년간 휴가를 냈다고 한다. 오르막은 잘 오르는데 내리막에서는 무척 신중하게 걷는 것 같았다. 푸근하게 생긴 인상에, 땀에 젖어 바다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왠지 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짧게나마 내 속내를 이야기하고, 그녀도 자기 자신과 여동생에 대해 말해준다. 다른 여행에서는, 아니 일상에서 가까운 사람과도 좀처럼 나누기 어려운 대화이다. 사실 까미노에서도 이런 기회가 생각보다 흔한 것은 아니다.  





  대도시는 순례자를 반기지 않는다. 대도시에 들어서면 콧털이 삐져나오지는 않았는지, 머리가 한쪽으로 눌리지는 않았는지 신경이 쓰인다. 짐으로 사람을 칠까봐 걸음도 조심스러워진다. 스틱도 집어넣어야 한다. 신호등도 기다려야 하고, 자동차 매연으로 숨을 훅 참아야 하는 순간도 온다.  산세바스티안은 근사한 도시지만, 하루 종일 걸은 뒤에 편안하고 조용히 쉴만한 휴식처는 아닌 것이다.  거기다 순례자 알베르게가 없어서 유스호스텔에 묵어야 했는데, 수용인원은 수백명 규모이지만 리셉션이 너무 작아서 밖으로 드나들려면 세명은 어깨로 밀치고 나가야하고, 세탁실도 없고, 냉장고도 작고, 젊은 놈들은 상의를 벗고 설치고 다니고, 밤에는 핑크플로이드 머니를  세상에서 제일 금욕적으로 부르는 밴드가 떠들어대서, 맥주맛도 떨떠름해졌다. 이런 곳에는 숙소 규칙이 잔뜩 붙어있지만, 덩그러이 방만 내주는 순례자 숙소보다 더 엉망이고 불편하기 마련이다.


여섯시쯤 저녁 먹을 곳을 찾다가 케밥집에 갔다. 이인용 테이블 세개를 두고 젊은 터키인 한명이 장사하는 곳. 조명은 어둡다. 에이치와 나는 각자 4유로짜리  케밥과 4.5유로짜리 드럼, 1유로짜리, 콜라를 먹었다. 우중충하고 약간은 지저분했지만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이미 괜찮아 보이는 식당 두어군데에서 식사는 자녁 일곱시 반에나 가능하다며 내쫓긴 뒤였다는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이 날 이후에도 이만큼 만족했던  끼니는 드물었다. 케밥을 먹고 나와  굴 하나에 5유로하는 핀초바에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치이며 맥주를 한잔 했다. 오른팔에 잔뜩 문신을 하고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늘씬한 웨이트리스가 서빙해준다. 그녀가 살짝 미소만 지어줘도 나도 모르게 살살 웃음이 나온다.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그녀에게 ‘에레스 보니또’라고 하니 '그라시아스'라고 하는데 자주 듣는 얘기지만 또 들어도 나쁘진 않네요, 라는 표정이다.   





세계적인 휴양지 산세바스티안에서 싸구려 케밥집과 비싼 타파스바 한곳을 다녀온 것 말고 전날 아무것도 못했지만, 다음날 새벽 풍경은 괜찮았다. 해변에는 새벽에 조깅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고, 해변 한가운데 전면이 통유리로 된 체육관이 눈길을 끌었다. 사실 산세바스티안은 긴 해변이 인상적이고, 깨끗하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멋지게 물건을 전시한 상점들이 즐비하고, 사람들 옷차림도 전반적으로 귀티가 나는 곳이다. 고양이도 이곳에서는 여유가 있고 멋을 내는 것 같다. 이런데서 태어나 자라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디서 태어나는지에 의해서 인생의 상당부분이 이미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인도 뉴델리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것과 스페인의 부자 도시 이곳에서 태어나는 것의 차이는 두 도시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큰 것이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마찬가지이다.






자라우츠까지 가는 길은 차콜리 밭과 방목장과 바다가 번갈아가면서 나타났다. 자라우츠 초입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벤치와 휴지통이 있었다. 이곳에서 목 뒤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한참 앉아 있다가 내려갔다. 기분 좋은 날이다.



자라우츠 알베르게에서 주인 아줌마와 약간의 흥정을 했다. 다음 날 아침식사가 여덟시라고 하는데, 우리는 일곱시쯤 숙소를 떠날 계획이기 때문에 어차피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침식사와 맥주를 맞바꾸자고 하니, 이 아줌마는 알듯 알듯 모를듯 미소를 지으며 거절한다. 절대 안된다는 손짓이고, 어쩔수 없다는 어깨짓이다. 아침식사는  여덟시. 너가 먹든 먹지 않든 아침식사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알겠다고 한 나에게 몇번이나 ‘아침식사는 거기 있을 것이다’(몇 번 들으니 약간 시적이다)라고 되풀이하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병 꺼네준다. 그러면서 이것은 서비스일뿐, 아침식사와 맞바꾼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내가 이걸 마셔도 아침식사는 내일 여덟시에 거기 있을거라고 한다.  나야 어찌되든 상관 없으니 덥석 맥주 한병을 받아들고 마신다. 그 날 저녁 사람좋게 보이지만 거스름돈을 잘못 거슬러주고 세탁물 가져다주는 것을 깜빡한 그녀의 남편을 보고 나니, 그녀의 고집이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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