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 열번째 날. 미라하촌(쿠루루사키 민박) - 39번 찰소 엔코지 - 스쿠모(호텔 마나베)
산 속 마을과 마을을 잇는 2차선 임도를 따라 쭉 걸었다. 햇볕이 정면에서 내리쬐니 겨울임에도 꽤나 뜨거웠다. 오늘은 스쿠모에 다시 입성하는 날이기도 하다. 치욕의 스쿠모랄까, 빠칭코도, 도색잡지 구매도 제대로 못한 곳이다. 그 도색잡지는 아직도 배낭 제일 밑에 깥아두고 있다.
스쿠모에 한 시간 정도 못미쳐서, 고치현의 마지막 찰소 39번 엔코지에서 납경을 했다. 산밑에 있는 단아하고 고즈넉한 절이다. 동네사람들도 제법 들른다. 바랜 나무색과 회벽이 잘 어울렸고, 간간히 울리는 종소리도 오후 세시 토요일을 기분좋게 가로질렀다. 사실 38번 찰소 콩고후쿠지에 비하면 볼품없지만, 고치현 마지막 찰소라는 느낌에 좀 각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1번 찰소 료젠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든다. 이제 반은 온 것이다.
아시즈리 미사키부터 절뚝거리며, 이틀거리도 안되는 곳을 삼일만에 도착하니 좀 더 특별한 것 같기도 하다. 느리게 걷는 방식은, 최대한 걷고 저녁에 녹초가 되는 걷기여행과는 좀 다르다. 억지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긴 하지만, 거리에 욕심을 내지 않으니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지고, 쉴 때 불안한 기분도 들지 않고, 카페 주인에게 실없이 커피맛이 괜찮다면서(그렇지 않을때도) 말을 걸기도 한다. 사진을 찍을만한 여유와 기분도 좀 더 자주 느껴진다. 길을 약간 헤매도, 하루에 35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날에는 신경이 곤두섰지만 22킬로미터만 걸어도 되는 날에는 별로 개의치 않게 된다. 동행이 생기기 어렵겠지만, 계속 혼자 걷는것도 그것대로 의미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예전 여행에서 하루에 50킬로미터, 이틀에 100킬로미터를 걸은 적이 있었는데, 막바지에는 어서 이 걸음이 끝나기만 바랐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성취감이 고작이었다. 22킬로미터를 걸으면서 느꼈던 느긋함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과시적이고, 경쟁적이고, 어딘가 불필요하게 과장되어 있다.
밤 7시가 지나면 별빛 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며칠을 보낸 뒤, 오랜만에 인구 5만 정도의 도시에 들어오니 편의점도 쉽게 찾을 수 있고, 일본 위스키를 파는 술집도 기웃거리게 된다. 내가 간 술집은 화이트하우스라는 곳이다. 답답한 마음에 이 술집에 들어왔고,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6,000엔을 내놓고, 이게 전부니 알아서 스탑해달라고 요구했다. 바텐더가 붉은색 조끼에 검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기무렛에 고치현 특산 과일을 넣어달라는 나의 요구도 나오시치를 넣어 척척 만들어주고, 옆테이블에 유치해 보이는 칵테일을 서빙하길래 뭔지 물어보니 초콜렛 마티니라고 답하며 자신도 알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절래절래 젓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타케츠루 17년을 두어 잔, 기무렛, 추천 칵테일, 기린 맥주(이것도 633미리짜리를 내주었다) 등등 마시고 나니 5500엔이라고 하길래, 500엔짜리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서 진토닉을 마시다가 술을 엎질렀다. 한시간 반 동안 꽤나 마셔댄 것이다. 나는 술자리에서 취해 술잔을 엎는 사람을 대단히 우습게 보는데, 내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잠시 멍했다. 그 바텐더는 내가 괜찮은지 다급하게 물었고, 나는 고개만 한번 끄덕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선물이라고 하며, 증류주 200미리짜리 한 병을 주었다. 유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당신이 술을 엎지른 것은 취해서가 아닙니다.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집에 가서 이것 드세요. 당신은 괜찮습니다. 이 병을 손에 쥐면 조금 전 일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겁니다,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문채 웃음을 보이며, 나에게로부터 나를 지켜준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 술은 한모금만 마시고 버렸다. 맛은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