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다녀왔다. HS가 이곳을 추천해주었는데 혼자 가기 영 쑥쓰러웠고, 한국에 잠시 방문한 외국사는 친척들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고 하고 이곳에 데려왔다. 몇가지 소감.
1. 작품을 보기 전에는 어떻게 추상화를 접할 것인지 고민이 되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편하게 들었고, 그림을 보고 있는 시간 동안 제법 즐거웠다. 이 즐거움은 상당히 직접적이고 즉각적이어서 그러한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2. 1. 같이 간 친척은 어렸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문화를 거의 모르고 한국말도 거의 못한다. 그리고 친척의 인척은 미국인이다. 이들을 오전에 환기미술관 오후에 창덕궁/창경궁에 데려갔는데, 이들이 더 흥미를 느낀 곳은 환기미술관의 추상화 작품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문화에 대한 경험 없이 창덕궁을 보면 시큰둥하다. 그런데 추상화는 사전에 지식이나 경험을 요구하지 않고 어떤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추상화가 요구하는 지식이나 경험은 없는 것일까. 점, 선, 면에 대한 경험만 있다면 족한것일까.
2. 2. 액션 영화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복잡한 플롯, 기묘한 심리투쟁, 첨예한 인종 지역 갈등 등이 담긴 영화는 사전 지식, 경험 없이 완전하게 즐기기 어렵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복잡한 작품이고, 더 뛰어난 작품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구분이 추상예술작품에는 적용되지 않는가.
2.3. 만약 적용된다면, 더 많은 점, 선, 면에 대한 경험이 필요한가, 아니면 더 많은 추상화에 대한 경험이 필요한가. 후자라면, 어찌되었든 결국 어떤 종류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것 아닌가.
3. 1. 의미의 문제. 추상화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해석을 하든지 모두 열려 있다고 한다. 나는 예술에 대한 이러한 '열린'주의에 대해서 약간 멀미를 느낀다. 문학작품이 특히 그렇다. 작가의 의도는 중요치 않고 독자의 해석이 중요하다고 한다. 모든 해석이 하용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인생 낙오자들은 일찍 걸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해석이나 "위대한 개츠비"에서 불법적으로 돈을 벌고 결혼한 여자를 탐내면 벌받는다는 해석도 무방하다는 것인가. 이것들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틀리다는 것은 정답을 전제로 하는 것일테므로), 그 작품의 본질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3. 2.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가지고 갈대는 바람에 좌우로 흔들린다,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변한다, 의식의 유동성이 인간의 본질이다, 이런것도 하나의 열려있는 해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이런 해석을 본적이 있다) 팡세의 이 구절은 인간의 연약함과 우주의 강대함을 대비시키고, 연약한 인간이 우주에 대하여 사유를 할 수 있으므로 사유하지 못하는 우주보다 인간이 더 위대하다는 (상당히 관념 중심적인) 주장임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의식의 유동성을 팡세로부터 해석해낸 것은 오해다.
3. 3. 이처럼 어떤 해석은 본질을 감상하지 못한 것일 수 있고, 어떤 해석은 오해일 수 있다.
3. 4. 해석은 감상자에게 달려있고, 열려있고, 틀린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편하게 감상하라고 해보았자, 모든 해석이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문제는 표현만 달라져서 여전히 존재한다 - 어떤 해석이 다른 해석보다 낫다. 이걸 가지고 틀리다 맞다라고 하지 않는 것 뿐이다. 나는 더 나은 해석을 원한다.
4. 1. 추상화를 감상할 때 어떠한 종류의 감각 X가 내 안에 생겼고, 그 감각은 전달되거나 표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생각을 접할때마다 의문스럽다. X를 타인에게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면, X를 느꼈을 때로부터 며칠 뒤의 나는, 그 당시의 감각 X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며칠 뒤에 내가 다른 추상화를 보았을 때 어떤 감각이 또 생겼다면, 그것이 X인지, 2X인지, 아니면 Y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4. 2. 내가 알 수 있다고 단언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맞는 것 같은 감각 'Z'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가.
5. 1. 내가 김환기 작품들의 점들을 보았을때, 사람들의 움직임을 머리 위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질서와 혼란같기도 하고, 개인들의 단절같기도 하고, 그 개인들이 서로 부딪치려는 것 같기도 하고, 부딪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혼란스러움이 캔버스 안에 모여있으니 약간 안심이 되기도 했다.
5. 2. 다음에 감상하면 어떤 기분이 들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