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본격 음주
십수년 전 군생활을 같이 했던 동기와 도쿄 음주 여행에 나선다.
#첫날 점심
카구라자카에 있는 소바집에 간다. 소바집이지만 사케 종류가 꽤 많고, 시로호나카 맥주도 맛볼 수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우선 맥주부터' 주문한다.
기본안주로 소바미소가 딸려나온다. 소바미소는 메밀열매와 미소를 섞은 것인데, 이 음식의 목적은 노골적인 음주량 확대이다. 적당한 짠맛과 단맛이 술을 부르고, 젓가락에 찍어 야금야금 먹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계속 먹어도 배가 불러오지 않는다. 시로호노카 맥주는 삿포로 맥주의 상위 브랜드로, 향이 화려하고 가볍다. 음식 없이 쭉 들이키면 세련된 남자가 되는 느낌이다.
이 음식점에 온 목적은 사실 닷사이 23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작은 잔으로 두 잔 나오는 도쿠리에 담아주면서 2,800엔이나 하지만, 이 사케를 맛보면 다른 사케는 시시해진다. 복잡한 맛에 끝맛도 상당히 길고 딱 싫지 않은 만큼만 닷만이 난다. 닷사이 23을 두어잔 하고 여자 점원에게 다른 사케를 추천해달라고 하니 마쓰미를 가져다 주는데, 가볍고 산뜻한 것이 상당히 여성스러워서 닷사이 23과 대조된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추천해 준 술은 맛없어도 두 잔은 마셔야 한다는 동행의 신조에 따라 한잔씩 더 한다. 그 후 우리는 훼손당한 남성성을 위로하며 다시 닷사이를 들이킨다.
소바와 뎀뿌라를 시켜먹고도 성에 차지 않아서 음식 추천을 해달라고 하니, 마쓰이를 추천해 준 점원이 우리에게 메뉴를 알려주지도 않고 주방에 주문을 넣는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내온 음식인 오리 냉채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부드럽고 축축한 오리고기에 아삭한 양파 등을 곁들여 먹으니 산뜻하면서도 힘이 나는 기분이다. 어이 이봐요, 그렇게 술을 마셔대는 술꾼들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내가 잘 안다구요, 하는 기분으로 그 점원은 이 음식을 내온 것일테지.
이곳을 나서 카구라자카에서 친잔소호텔을 거쳐 메지로역에 있는 숙소까지 한시간 반 가량 걷는다. 친잔소 호텔에서는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세면대 위에 휴지가 아닌 천수건이 올려져 있다. 손님이 너무 많지 않은 고급 호텔의 위엄인가. 이 호텔의 로비부터 정원 초입까지는 중후하고 고급스러운데, 정원에 막상 들어서면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백제 양식의 탑을 감상하고, 정원 언덕 중턱에 걸터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호텔을 나서 메지로거리를 따라 메지로역까지 간다. 우리는 휘적휘적 걷는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본여대의 학생들이 우르르 같은 방향으로 몰려간다. 전철역을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우리가 계속 뒤쳐친다. 그 중 어떤 여학생은 우리를 앞지르려고 도로로 잠깐 내려섰다가, 뒤에서 달려오는 버스와 부딪칠 뻔했다.
#첫날 저녁
다카다노바바에 있는 이자카야에 간다. 이곳은 좋은 사케를 싼값에 잔술로 마실 수 있다. 십사대(쥬온다이)도 한잔에 460엔꼴이다. 이곳에서 제법 사케를 많이 마신다. 가장 윗열의 사케가 마음에 들고, 그 이후의 것은 잘 기억이 안난다.
음식도 대단했다. 사시미, 조림, 나메로, 반건조 오징어(맞나?), 전갱이 구이 등 뭐 하나 빠지는게 없다. 특히 조림은 무에 깊은 맛이 베어있고, 고기는 녹듯이 씹힌다. 나메로는 된장회무침인데, 사케의 약간 심심한 듯한 측면을 채워준다. 두부튀김의 튀김 옷은 바삭하고 뜨거운데, 그 안의 두부는 기름을 머금지 않고 담백한 상태 그대로이다. 토오베(미소와 두부를 같이 발효한 것)는 술꾼을 위한 안주인데, 이 안주와 사케 나나호시(七星)의 조합이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취기의 종착역으로 직행하게 된다. 중간에 내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후 메지로에 돌아와서 식당이 몰려 있는 곳을 어슬렁대며 맥주 두어잔 더 하고 라면집에서 라면 한그릇을 비운다.
#둘쨋날 점심
츠키지 시장에서 초밥과 맥주를 마셨지만, 그저 그렇네.
#둘째날 오후
하마리큐 공원을 산책하고, 공원 내 찻집에서 마차를 마신다. 여기 공원은 넓은 터와 좁은 숲길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나무들이 그리 높지 않아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중 압권은 연못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찻집 '나카지마오차야'이다. 찻집에 앉아 흐름이 없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것을 느끼기 어렵다. 다만 메뉴에는 마차밖에 없다. 생맥주가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자, 고운 중년의 점원은 무슨 대단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음을 참지 못한다. 이곳 찻집에서는 1870년경 미국의 그랜트제독과 메이지덴노가 대담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생맥주를 아쉬워하며 마차를 마신다. 그랜트제독 역시 맥주가 필요했겠지.
#둘째날 저녁
꽤나 돌아다녔다.
1.
우선 하마리큐에서 가까운 긴자의 Hibiya Whiskey Bar I 을 간다. 개점시간에 맞추어갔는데, 누군가 바를 통채로 빌렸는지 라이트도 켜지 않고 종업원 둘이 뭔가를 열심히 한다.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비굴하게 1시간만, 아니 30분만 마시고 가면 안되겠냐고 사정했으나 거절당한다. 이정도라면 싸구려 위스키 한잔씩 주고 내쫓을 법한데, 그정도 '유드리'는 없나 보다. 아무튼 바빠 보이는 점원들을 붙잡고 얘기해서 될 일이 아닌것 같으니 쫓겨날 수밖에 없다.
2.
근처에 있는 '트렌디'한 바에서 맥주 한잔을 하며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검색을 해보았더니, Hibiya Whiskey Bar II도 가까운데 있다. 이곳으로 갔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덩치는 크고 마음은 좁게 생긴 점원이 우리를 가로막고 '이곳은 산토리 위스키바입니다' 라고 통지하듯이 말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왔다.'라고 답한다. 그는 다시 '이곳은 테이블 차지가 1인당 650엔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ok'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그는 비켜선다. 아무도 없는 바에서 첫손님(분명 그럴 것이다)을 문 앞에 세워놓고 물어보는 꼴이 고약하다. 빈 가게에 앉았다가 바로 일어나서 나가버리는 손님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위스키는 양조장에서 만드는 것이지 이 바에서 만드는 것은 아닐테니 술맛은 괜찮겠지.
라고 짐작하였으나, 사실 기대에 못미친다. 히비키21년, 야마자키 18년, 하쿠슈 헤비 피티드를 마시는데, 부드럽고 좋은 술이긴 하지만, 음 그렇군, 부드럽고 좋은 술이군하는 느낌이 전부다. 하쿠슈는 피트향이 괜찮기는 한데, 한 잔에 3,000엔이라는 가격은 좀 과하다. (야마자키 18년, 히비키 21년보다 더 비싼 가격이다)
3.
그 다음은 오모테산도에 있는 닛카 블렌더스 위스키바에 간다. 예약을 18:30으로 해두었는데, 20분 늦게 도착한다. 헐레벌떡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니 꽤나 번잡하다. 역시 예약하길 잘했군, 하면서 예약할 때 받아둔 이름 '쿠로사와'를 찾았는데, 점원이 갸우뚱하더니 '마스타 쿠로사와?'라고 반문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니, 우리를 건너편 술집으로 안내해준다.
아무도 없는 술집에, 덩치크고 무심한 눈매의 중년 남자가 바 뒤에 혼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바 자리에 안내해주었다. 두 명의 예약이니, 두 개의 메뉴판이 바 위에 올려져 있다. 아무도 없는 술집에, 바 위에 올려둔 메뉴판 두개와 함께 20분을 보냈을 그를 생각하니 약간 미안해진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니,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무뚝뚝하지만 불친절한 타입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타케츠루 21년으로 시작한다. 역시 이 술은 훌륭하다.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들지만(심지어 닛카 위스키의 본거지인 삿포로에서도 못구했다) 아직 바에는 남아 있는 것이다. 부드러우면서도 밋밋하지 않고, 깊으면서도 감싸는 기분이다. 처음 한모금을 찔끔거리고, 그 다음부터는 아까워 다 마시지 못하고 다른 술들을 맛보다가 가끔 향만 맡는다.
샘플러는 대단했다. 12년산으로 구성된 여섯잔의 닛카 위스키 상품들을 차례대로 늘어두었는데, 가장 앞(왼쪽)에는 "Nikka Coffee Grain Whiskey", 가장 뒤(오른쪽)에는 "Sherry & Sweet" 위스키가 놓여 있고, 그 사이는 ''Soft & Dry", "Fruity & RIch", "Woody & Vanilla", "Peaty & Salty" 순서대로 놓여있다. 첫잔은 커피향 위스키로 시작했는데, 음 괜찮군이라는 느낌에서, 다음 위스키는 오 좋군, 그 다음은 아 대단한데, 그 다음은 아니 이거, 그 다음은 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단맛이 도는 셰리통 숙성 위스키로 끝낸다. 특히 Peaty & Salty는 피트향이 조금도 역겹지 않고 부드러운데다가, 짠맛도 살짝 느껴진다. 위스키에 짠맛이라니. 바텐더의 설명으로는 바닷가에서 양조를 한 영향이라고 한다. 이 위스키들의 라벨을 자세히 보면 'Nikka Blender's Bar'라는 문구가 있는데, 시중에서 유통되는 것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 여섯잔은 각 15ml씩 담아주었고, 가격은 4,000엔이다.
마스타 쿠로사와에게 "우리는 산토리가 운영하는 히비야 위스키 바에서 한잔하고 왔는데, 이를 후회하고 있다"고 하며 닛카 위스키를 추켜세우자, 그는 산토리가 메이저이고 닛카는 마이너라고 답한다. 그런가. 그러나 이곳에 중후하고 편안한 마스터 쿠로사와, 훌륭한 테이스팅 세트, 피티와 '솔티' 위스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에 꼭 마실 수밖에 없는 타케츠루 21년이 있다면, 산토리바에는 어두컴컴함과 비싼 가격표밖에 없지 않나, 하는 기분이다.
4.
오모테산도의 야키도리
닛카 블렌더스 바에서 나와 오모테산도에 있는 꼬치구이집에 간다. 레바(간) 요리가 아주 맛있다. 술은 기린 생맥주.
5.
나카메구로의 와인바
나카메구로의 SCAD에 가서 샴페인 앙드레 로저, 오쉐 뒤레스 지역의 샤블리 프리미어 크뤼, 오레곤 지역의 피노누아 와인, 네 종류 치즈, 하몽, 쿠바 시가를 즐긴다. 신이시여, 내가 이것을 주문했단 말입니까. 술값을 보고 눈물을 머금는다. 그나마 선물로 받은 쿠바 시가가 면세점에서도 제법 비싸게 팔리는 것을 보고 위안을 삼는다.
#셋째날
아침에 Afuri에서 유자라면을 먹으면서 아사히 흑맥주 반잔을 마시고, 요요기 공원을 산책하고, 그 안 메이지 신사 옆의 사케통과 와인숙성통을 보면서 일왕을 부러워하고, 도쿄 역 앞 Concept에서 소화제를 사먹고, 내장지방제거제와 숙취해소제 헤파리젠을 사고, 나리타공항에서 우동과 아사히, 교자와 기린맥주롤 즐긴다.
삼일 동안 사케, 일본맥주, 일본위스키, 와인, 제법 마셨다. 아마 시간당 음주량으로 따지면 내 인생에서 전무후무할 듯 하다. 그리고 마시면서 느낀 만족감도 정말 대단했다.
이로서 체중이 1.5kg 늘었고, 음주인으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