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회 5편
한병철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에 대해 고민한다. 단순히 사람들의 집합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인 공동체와 어떤 점이 다를까?
...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 Ansammlung가 생겨날 뿐이다. 그러한 무리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 즉 '우리'가 될 수 있는 집회 Versammlung와 구별된다. 무리에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 <투명사회>, 한병철, 100-101쪽 -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 1855-1936)는 인간들의 무리에는 두 가지 다른 형태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공동사회 Gemeinschaft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사회 Gesellschaft이다. 공동사회는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의지(Wesenwille)에 의해 결합된 사회를 의미한다. 이곳의 관계는 혈연, 지연, 정서적 유대에 기반하며, 비타산적이고 친밀하며 구성원들은 공동의 가치와 전통을 공유한다. 반면 이익사회는 도시, 기업, 국가와 같이 목적을 위한 합리적인 의지(Kürwille)에 의해 인위적으로 결합된 사회를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계약, 이익 등 개인의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관계는 대체로 익명적이고 형식적이며, 이는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계적 결합체이다. 이익사회에서는 호칭조차 투명하다. 누가 불러도 같은 호칭을 갖는다. 부장은 사장에게든 신입사원이든 혹은 인턴에게도 부장이다. 하지만 공동사회에서 아버지는 아버지인 동시에 아들이면서 또한 삼촌이기도 하다. 공동사회에서의 역할은 이익사회와 달리 불투명하다. 관계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며, 이 복잡한 관계가 때로는 통제로 작동한다.
한편 한병철이 제시하는 '우연한 무리'는 이익사회보다 더 즉각적이고 일시적이다. 이익사회에서처럼 '우연한 무리'는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특징을 공유한다. 이익사회에서의 '결여된 정신'은 지속성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익사회에서와 같이 투명사회의 '결여된 정신' 역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한번 받은 '좋아요'의 지속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이익사회에서는 '국가', '직업', '직책' 등으로 자신의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투명사회에서는 끊임없는 이미지의 갱신이 요구된다. 디지털 공간에서 생산자는 자신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얻는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자기 착취를 요구받는다.
결국에는 사회적인 것Das Soziale의 착취임이 드러난다. 사회적인 것은 생산 과정의 기능적 요소로 전락하고, 조작 가능하게 되며, 이로써 무엇보다도 생상 관계의 최적화에 봉사한다. - <투명사회>, 한병철, 101쪽 -
자유로운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자발적 생산자는 소비자들의 '가상의 자유'에 의해 생산의 방향을 강요받게 된다. 유투버들의 콘텐츠 제작은 시청자들의 클릭수와 댓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소비자의 '자유'는 생산자에게 강요받을 '자유'를 강제로 부여한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 <투명사회>, 한병철, 102쪽 -
뱅크시가 그린 <풍선을 든 소녀(Girl with Balloon)>은 잃어버린 순수함의 상징이거나 혹은 지속적인 희망에 대한 아픔을 은유화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벽화에서 뱅크시가 남긴 "언제나 희망은 있다(There is always hope)"이라는 문구는 손에서 멀어지지만 여전히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아련함을 강조한다. 소녀가 손을 뻗고 있는 빨간 풍선은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자유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떠나가는 사랑을, 또 누군가에게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풍선을 든 소녀>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은 2018년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 등장했다. 136만 달러에 낙찰된 이 작품은 작품의 새로운 소유주의 손에 넘어가기도 전에 자동 파쇄된다. 뱅크시는 액자 속에 있는 자유를 해방시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를 해방시켰다. 오직 희망의 빨간 풍선만이 액자 속을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은 <사랑은 쓰레기통(love is in the bin)>로 불리게 된다. 생산자로서의 예술가는 소비자의 자유에 의해 통제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뱅크시는 보여준다.
뱅크시에게 자유는 곧 거부이며, 해방이다. 한병철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투명사회에서 자신을 지키고 사랑을 지키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그의 책 속에서 분명히 전달된다. 알베르 까뮈에게 인간의 존재는 저항(L'Homme révolté)하는 데 있었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Je Je me révolte, donc nous sommes.)
그에게 저항은 궁극의 자유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유롭지 못한 세상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존재 자체가 반항이 될 정도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