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
<옳고 그름의 상실>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긍정성에 물음을 던진다. 니체가 1886년 발표한 <선악의 저편>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옳고 그름은 특정 시대, 특정 권력층의 잠정적 도덕 기준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의 가장 도드라지는 문제점은 정보의 무제한적 공개를 통한 비판적 능력의 마비 혹은 나태함의 유발에 있다. 과거 정보는 특정 집단에 의해 독점되고 그것에 신비성과 신성함을 부여하여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소수의 이익에 참여하도록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지극히 자신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 많다. 소수의 의견이라도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여론을 형성하여 다수의 의견에 맞선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여러 논쟁적 이슈는 '다양성'이라는 이름 속에서 토론을 형성하기보다 위세의 싸움으로 변질된다. '국룰'은 다수의 의견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다수와 소수의 의견차이는 최소한의 기준이 상실된 현실에서 방향성을 상실한다. '다양성'이라는 긍정성은 무제한적 의견의 허용으로 변모되었고, 때로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조차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중심의 상실'은 "투명"과 같은 긍정성에 대한 무비판적 사유에서 비롯된다. 사회는 점진적 발전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소 큰 폭과 작은 폭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발전에는 연결성이 발견된다. 하지만 무비판적 언어의 사용은 양자도약과 같은 분절점을 만들어낸다. "투명성", "선", "악"과 같이 고정된 가치처럼 여겨지는 언어는 지시되는 대상의 모호성을 지닌다. "착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모두가 같은 사람을 지칭한다면 그는 신 혹은 완벽한 연기자일 수 있다. 이론적 관점이란 구경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대상을 다르게 인지할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똑같은 상(像)을 갖는 것은 완전한 연극적 연출 상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이론의 부재는 사적영역에서 '제멋대로'의 삶을 허용하는 동시에, 공적영역에서 용서와 화해가 사라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잘못'은 더 이상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는 자신만의 '잘못'의 이유가 있고, 그것은 자신의 변호하는 완벽한 갑옷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이미 벗어던진 기준의 틀이 '완전한 자유'라는 허상과 무분별한 억견(doxa)으로 와해되면서 아포리아(aporia)에 빠지고 말았다.
<사유의 여백>
한번 빠진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맛본 자유는 구속과 통제의 이유를 망각했고, 속박에서 벗어난 이들은 규범이라는 결과로부터의 도피를 기억할 뿐이다. 성경의 무분별한 독서를 막았던 중세의 논리는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이 있었고 또한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금서의 지정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창궐하는 가짜 뉴스와 조작된 정보들은 왜곡된 시선의 틈을 놓치지 않았고, 이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믿음의 영역으로 향하는 듯하다. 합리성만으로 무장한 근대의 상상력은 폭력이 난무하는 두 차례의 전쟁이라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고, 비이성의 영역을 포괄하고자 했던 근대 이후의 노력은 아직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안전지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2500년 전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무지의 지"이다. 이 현명한 철학자가 그토록 절절히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사유 밖에 있는 잠재적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사유의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 자신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철저히 불투명하다. 너머의 공간에는 무수히 많은 자신의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어떤 여백을 어떻게 채울지는 누구를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누냐에 따라 결정된다. 타인과의 대화 혹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내면의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새로운 자신을 잉태하는 창조적 행위이다.
<homo ludens>
현대사회는 자신을 잉태하는 창조적 행위조차 '자기 착취'의 강박으로 변질시킨다. 멘토를 정하고 그의 위치에 이르는 매우 투명한 자기 창조는 스스로를 또 다른 틀에 가두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자유는 '성공'에 의한 가난과 무시로부터의 자유, 즉 '하고 싶은 것'을 구매할 수 있는 권능이다. 이제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멘토의 위치에 올라 또 다른 이들의 멘토가 된다. 더 이상 도달하고 싶은 상(像)을 상실하고 또다시 길을 잃게 된다. 그들이 목표로 삼고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양적 증식이다.
더 높은 차원의 자유는 그러한 강박에서 벗어난 '유희(Spiel)의 자유'이다. 유희, 즉 놀이는 목적이나 성과 없이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목적이다. 현대인들이 가지는 '의무적 취미'는 놀이조차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갖는다. 목적이 없는 유희는 불투명한 쓰임새, 즉 무쓸모의 쓸모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산책과 취미활동 그리고 예술작품의 감상은 그 자체로는 쓸모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산책은 사유의 여백을 만들고, 취미활동은 노동의 강박의 너머로 이끌며, 예술작품은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현실을 벗어난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은 "어떻게 성공에 이를까?"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그가 내놓는 것은 "나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혹은 "나의 성공이 우리의 행복이 될 수 있을까?"와 같은 철학적 질문이다. 그의 유희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경쟁을 생존이 아닌 창조의 장으로 승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