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38일 차 - 무지개, 국가가 끝나는 곳?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3>

by Homo ludens

[무소유, 소유되지 않는 소유]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공동체의 연대감과 소속감을 높일 수 있지만, 이것이 무비판적으로 작동할 때 광기와 적개심으로 질병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무비판적 애국자(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는 어떻게 공동체를 병들게 할까요?


여기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창조하는 자의 업적과 현자들의 보물을 훔쳐낸다. 저들은 저들의 도둑집을 불러 교양이라고 하지. 그리하여 저들에게 모든 것이 병이 되고 재난이 되고 만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은 창조하는 자들과 현자들을 '모방'하고, 그들의 업적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왜곡시킵니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니체의 영웅주의적 철학이 히틀러의 등장을 긍정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교양(Bildung)'은 독일어로 '만들다', '창조하다'의 bilden에서 유래합니다. '교양'은 만드는 것,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가 '스스로를 교육하다'을 의미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만드는 과정이 '교양'입니다. 다른 것을 습득하고 모방하는 것은 '교양'을 갖추기 위한 재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교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모방하는 것은 스스로 '확증편향'을 키우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교양인의 필수조건은 '비판적 시각'입니다. 비판을 상실한 맹목적 지식은 병처럼 번져나가 광기를 키우는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자나 깨나 병들어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담즙을 토해내고는 그것을 불러 신문이라고 한다. 저들은 서로를 게걸스럽게 먹어대기는 하지만 제대로 소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맹목적 지식이 발표되어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것은 '언론'을 통해서입니다. 비판을 상실한 개인보다 비판을 상실한 언론은 부정적 감정을 배출하기를 부추길 뿐입니다. 정치적, 외교적 프로파간다는 비판 능력을 상실한 자들의 안주가 되어 이성을 상실한 듯 삼키고 뱉어내기를 반복하며 무섭게 번져나갑니다.


모두가 왕좌에 오르려 하는 것이다. 마치 행복이라는 것이 왕좌에 앉아 있기라도 하듯. 정신 나간 짓들이다! 흔히 진흙이 왕좌에 앉아 있기도 하고, 왕좌 또한 진흙에 앉아 있기도 하거늘.

비판 없이 만들어진 교양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을 동경하게 만듭니다. 왕좌라는 것이 마치 최고의 선으로 여겨지듯, 현대 사회에서 '부자'는 모두가 원하는 상태이자 '행복'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모든 부자가 최고의 행복을 누릴만한 존경받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진흙과 같이 더러운 자들이 그곳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부자' 혹은 왕좌를 차지한 자라고 해서 그들의 정당성을 갖는다는 원인이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일시적 권력을 비판 없는 자들은 그토록 갈구합니다. 그것이 비록 짧은 기간의 극상의 행복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전 생애를 바쳐 그것을 즐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미 목적을 상실하고 쾌락에 중독되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들은 오히려 반대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는 아직도 자유로운 삶이 열려 있다. 진정, 적게 소유하고 있는 자는 소유되는 일도 그만큼 적을 것이다. 복 있나니, 조촐한 가난은!

자유로운 삶은 '선택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많은 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해 선택됩니다. 3대의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어떤 자동차를 탈지 '선택'하는 듯 하지만, 그에게 '걷는다' 혹은 '대중교통'이라는 선택지는 없는 듯한 착각이 생깁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기본적인 '소유욕'을 먹고 자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자 할 때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키워갑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을 것을 필요하도록 생각하여 소유욕을 키우도록 만듭니다. 비로소 그들은 모든 것이 필요한 듯한 착각 속에서 소비를 위한 소비의 굴레에 빠져버립니다. 위대한 영혼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삶'은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찾는 항해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구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것입니다. '무소유'는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닌 소유한 것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기심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타인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것이 끝나는 곳, 거기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지 않은 사람들이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꼭 있어야 할 자들의 노래, 단 한 번뿐이며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멜로디가 시작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국가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국가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획일성의 폭력으로 개인의 개성을 말살시키려는 국가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모두가 국가를 위해 대체 가능한 자원으로 취급받지 않고, '대신할 수 없는' 위대한 인간으로 존립할 수 있는 국가를 차라투스트라는 긍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의 문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노래가 울려 퍼지기를 기대하는 능동적 주권자일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국가가 끝나고 있는 저쪽을 보라! 무지개와 위버멘쉬에 이르는 다리가 보이지 않느냐?

그리고 그곳에는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회색빛의 하늘이 아닌 다양한 색이 저마다 주인임을 자처하는 무지개가 드리운 하늘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생명체가 다양성을 통해 '생'을 유지하는 기교를 부린 것처럼, 인간의 무리도 다양한 생각의 공존을 통해 다가올 위협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La_Danse_II,_par_Henri_Matisse.jpg <춤 II>, 앙리 마티스, 1909/10

마티스는 <춤 II>에서 단순한 색, 초록, 파랑, 주황만을 사용했습니다. 단순한 색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표현은 기존의 선입견이 배제된 개인의 주체적인 내면의 가치에 따라 표현되었습니다. 자유로운 춤을 추는 한 무리의 인간은 어떠한 그림자와 중력도 없이 부유하듯 하늘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구속도 없이, 그리고 누구도 겹치는 자세나 표정 없이 자유로이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누구도 우월하지 않으며, 누구도 뛰어나지 않습니다. 각자가 가진 본능적이고 순수한 기쁨과 생명력의 표현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의 춤으로 이어집니다. 왼쪽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손과 손 사이로 누구든 합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들의 춤은 그들만의 춤이 아닌 누구든 초대될 수 있는 열린 자유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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