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푸는 덕에 대하여 1>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한 도시 "얼룩소"를 떠나게 되자 그를 따르던 많은 젊은이가 따라나섰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자 그들은 그에게 "태양을 휘감고 있는 뱀"이 새겨진 지팡이를 선물합니다. 영혼회귀와 회복을 뜻하는 상징을 건네받은 그는 기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을 해보아라. 어떻게 하여 금이 최고의 가치에 오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금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고, 씀씀이를 따로 갖고 있지 않은 데다, 빛을 내는가 하면 광채 속에서도 은은하기 때문이다. 금은 언제나 몸을 바쳐 베풀기만 하는 것이다.... 베푸는 덕이야말로 최고의 덕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줄 수 있는 선물은 가치 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덕과 고귀함은 "희귀성"으로 정해집니다. 누구나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덕목이 될 수 없고, 아무나 고통과 시련을 참을 수 있다면 성인들은 추앙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의 비유로 차라투스트라가 설명하는 것은 희귀성과 더불어 '쓸모없음'입니다. 여기서 '쓸모없음'은 목적론적이지 않다는 의미로 '무엇을 위한 무엇'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돈을 벌게 해 준다거나 성공을 보장하는 말이라면 그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다를 바 없는 언어 기술자일 뿐일 것입니다. 그가 뿌리고 가는 말은 자신을 향한 고마움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덕은 금과 같이 자신은 그저 은은한 빛을 내고, 그것을 보는 이들이 그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너희의 영혼은 만족을 모른 채 끝없이 보물과 보석을 얻으려 노력하고 있다. 너희의 덕이 만족을 모른 채 끝없이 베풀려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일체의 사물을 강제하여 너희에게, 너희 속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한다. 그것들로 하여금 너희의 사랑의 선물이 되어 다시 너희의 샘에서 흘러나가게 하기 위해.
보통의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풂을 행합니다. 상대에게 베풀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대가 없는 선행을 행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대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를 괘씸해하는 마음이 싹트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선행에 대한 대가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랐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누구도 자신에게 그러한 선행을 강요한 적이 없음에도 서운한 마음은 상대를 몰염치한 인간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간악한 마음은 자신의 노력이 되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해 '사랑의 선물'로 포장하여 원치 않는 선행을 받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진정, 이처럼 베푸는 사랑은 온갖 가치를 강탈해 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 이런 이기심을 건전하며 신성하다 부르는 바이다. 또 다른 유형의 이기심이 있으니 단지 훔치려고만 드는, 너무나도 가난한, 굶주려 있는, 저 병든 자들의 이기심, 병든 이기심이 그것이다.
결국 베풂은 순수한 이기심에서 비롯될 때, 자신이 준 것을 받는 자가 그로 인해 느낀 만족감이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순환구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환구조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당연한 감사'의 고리가 끊어져야 합니다. 병든 자들의 이기심은 감사와 구걸의 반복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이기적인 베풂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소외받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보다, 기존의 권력이 가진 것을 강탈하여 그들이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이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동시에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단단히 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보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이기적인 베풂'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가 찬양과 비난에 초연해 있고, 너희의 의지가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써 모든 사물에 명령을 내리고자 할 때, 거기에 너희의 덕의 근원이 있으렷다.... 너희가 하나의 의지만을 의욕하는 자들이고, 온갖 곤궁의 이 전환이 너희에게 필연으로 불릴 때, 거기에 너희의 덕의 근원이 있으렷다.
이기적인 베풂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기존 가치를 강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 있습니다. 찬양에 도취되지 말고 비난에 좌절하지 않는 굳은 의지가 요구됩니다. 이 의지가 있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온갖 곤궁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독일어의 'notwendig'라는 단어를 분리하여 'not-wendig'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필연적인', '어쩔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notwendig는 '곤궁'과 '전환하는'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곤궁 속에서 어쩔 수 없음에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고, 곤궁을 뒤집어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의지를 갖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존재가 자신을 곤궁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수동적 의지를 니체는 '노예 도덕(Sklavenmoral)'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곤궁은 자신의 손으로 딛고 일어서는 '주인의 도덕(Herrenmoral)'을 지닌 자는 타인의 베풂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베풂에 대한 직접적인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면의 고통에 시달리던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봅니다. 1888년 자신의 귀를 자른 예술가는 이듬해 1889년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작품활동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노력합니다. 고흐는 1888년 아를에 도착한 직후부터 그곳의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동생 테오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쇠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인해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 고흐는 "우리는 별에 도달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미 종교에 환멸을 느꼈던 고흐는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대신 예술이 자신을 치유하고,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예술활동은 건전한 이기적 베풂으로 우리에게도 아름다움을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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