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은 규범의 주된 요인이 옳고 그름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보다 '정서'에 있다고 보았다. 사회의 규범에서 어긋난 단체는 그들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운동을 펼치기보다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정서를 바꾸는데 집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압도적 권력을 가졌던 견해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여 그들의 싸움이 결말을 맺지 못하고 균형을 이루자 그들은 서로의 자유를 보장하는 잠정적 휴전에 이른다. 각자는 자신의 자유를 침해받기 싫어하기 때문에 상대를 인정하는 척했지만 밀이 지적하듯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신이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하거나 관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러한 종교적 자유가 실제로 실현된 곳은 거의 없었다. - 밀의 <자유론> 서문 中 -
또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력의 억압, 특히 정부의 간섭에 대한 적절성도 그것이 미치는 객관성 실익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 "개인적인 선호"가 크게 작동한다. 동일한 정책에 대한 찬반은 정책이 가져올 손익이 자유와 사회악의 증감에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익과 손해에 대한 것도 명확한 관점이 있지 않다면 어느 쪽을 택하든 전체적으로 긍정성을 띠는지 알기가 어렵다. '정서'와 '선호'와 같은 주관적 원인이 규범의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사회적 대립을 밀은 "기준이나 원칙의 부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도 자발적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자기 보호를 목적"으로 할 때에만 정당화된다. 밀은 자기 보호를 "물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이익"과 구분한다. 물리적·도덕적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오직 '타인에게 끼치는 해악'을 막을 때만 개입이 가능하다. 사회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것은 '해악의 원칙'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만, 그것은 정당화된다". 다만 이러한 원리는 "정신적인 여러 기능들이 이미 성숙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된다.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미성숙'의 상태에 있는 청소년과 '후진적인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밀은 주장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듯한 밀의 주장은 그가 제시하는 자유를 유지하는 방법 때문에 생겨난다. 밀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적 결정이 유일한 방법, 즉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스스로를 개선할 능력을 가질 때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자유로운 토론'은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논리적 소통능력이며, '평등한 토론'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상대에 대한 계급적 우열을 나누지 않는 동등한 시민권의 보장이다.
밀이 '모든 윤리적인 문제들의 궁극적인 근거'로 여기는 것은 '효용(utility)'이다. 그의 공리주의적 태도는 '이해관계'로 사태를 파악하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개인보다는 사회 전체, 사회의 소수보다는 다수에게 이익이 될 때 문제는 줄어들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최소한의 해악을 끼치는 선택을 장려한다는 의미이다. 개인에 대한 사회의 개입이 개인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될 때 정당성을 가지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도록 두었을 때 더 낫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사회의 개입이 초래하는 해악이 그렇지 않을 때의 해악보다 적을 때이다. 자유 시장 경제에서 정부의 최소한의 개입이 허용되는 것은 시장의 필연적 결말, 즉 독과점을 막기 위한 것으로 더 큰 해악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생각의 의견에 대한 방대한 근거들을 제공할 수 있는 AI는 우리 스스로를 옹호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점점 더 구심점을 잃고 만날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의 충돌이 발생하기 일쑤다. 어느 것이 옳다는 기준이 사라진 곳에서는 모두가 스스로 옳다는 주장이 난립한다. 만약 하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더라도 AI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통해 부분적 오류라는 결론을 만들어낼 것이다.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생각과 사회의 존재를 위협하는 의견은 당당히 하나의 주장으로 자리 잡아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갈 수 있다. 밀의 공리주의적 견해에 따르더라도 이것은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범주에 속한다. 밀의 주장대로 '효용'을 떨어뜨리는 것은 제한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무엇이 사회적 효용을 떨어뜨리는가를 판단하는 주체 역시 인간의 주관적 선호와 정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적 위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AI가 제공하는 특정 근거들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검열한다면, 그것은 밀이 경계했던 '다수의 폭거'에 빠지게 된다. AI 시대의 규범은 '위험한 정보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AI가 쏟아내는 파편화된 근거를 사이에서 무엇이 보편적 가치인지 분별해 내는 '비판적 지성'을 기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각 주체들은 자신의 신념을 검증받기를 꺼리는 '정서적 독단'이 진정한 해악의 원인임을 깨닫고 소통가능한 논리로 공론장을 회복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회의 관습과 신념을 흔든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말과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제한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관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불편함을 불러오는 그의 말은 그를 따르는 제자와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생각의 잉태를 돕는 산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자신들의 생각의 틀을 깨는 그의 지혜는 자신만의 확고한 틀을 견고히 하는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불편함이라는 1차적 정서를 극복하고 나면 비판적 지성은 무엇이 과연 더 옳을 수 있는지, 혹은 잘못된 것에서도 어떤 점을 얻을 수 있을지와 같은 지식의 확장성을 이끌어낸다. 많은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육체의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는 진실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영혼을 지켜낸다. 그의 희생은 최소한의 해악으로 지식의 독단이라는 거대한 해악을 이겨내는데 일조했다. 규범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생각이 허용될 때, 비로소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선택은 충분한 효용을 가진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해악을 대가로 2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생각의 중요성을 설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