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79일 차 - 정의로 둔갑한 원한?

<타란툴라에 대하여 1>

by Homo ludens

[원한과 정의, 그리고 평등]

차라투스트라는 <타란툴라에 대하여>에서 '원한'이 어떻게 '정의'로 둔갑하는가를 폭로합니다. 타란툴라는 스스로 삶을 긍정할 힘이 없어, 남을 물어뜯음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복수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무엇을 노리고, 그것을 어떻게 빼앗으려고 하는지 알아봅시다.

보라. 타란툴라의 굴이다! 어디 한번 보겠는가? 여기 거미줄이 걸려있구나. 줄을 건드려 흔들어보아라.... 타란툴라여! 등에 세모꼴 반점과 표징이 까맣게 찍혀 있구나. 나 네 영혼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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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타란툴라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특징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타란툴라가 머무는 곳, 즉 동굴입니다. 동굴은 흔히 플라톤이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플라톤은 포박된 죄수에게 허용된 감각적 한계와 빛을 바라볼 때의 고통이 우리를 진리에 다가가기 힘들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을 타란툴라의 굴의 거미줄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타란툴라의 등에 있는 세모꼴의 반점과 표징은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as)'와 '성흔(stigmata)'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에 내재해 있는 죽음과 그 이후에 나타날 심판자에 대한 두려움을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약을 올려 너희를 허구의 동굴 밖으로 유인할 생각에서. 너희가 내세우고 있는 "정의"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앙갚음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에서. 앙갚음으로부터의 인간 구제, 이것이 내게는 최고 희망에 이르는 교량이자 오랜 폭풍우 뒤에 뜨는 무지개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한 철학적 교육을 통해 동굴 밖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노력한 것과 같이, 차라투스트라는 타란툴라가 만든 허구의 동굴에서 우리를 끌어내려고 합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의를 영혼의 조화라고 보았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약자의 복수'로 재정의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원한(Ressentiment)', 즉 스스로 창조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이, 남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심리적 기제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약자들이 생겨난 원인, 즉 구조적 문제의 해결에는 관심을 둘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들 위에 군림한 자들에 대한 복수에만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그들이 다시 누군가의 원한이 되는 것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복수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것을 인간 구제라고 합니다. 흑백의 선악 구분에서 벗어난 우리는 드디어 무지개가 보여주는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무력감이라는 폭군의 광기가 너희 내면으로부터 "평등"을 부르짖고 있구나. 너희가 더없이 은밀하게 품고 있는 폭군적 욕망이 이처럼 덕이라는 말을 탈로 쓰고 있는 것이다!

평등을 내세우는 예수의 사랑은, 신 이외에 모든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은 평등을 인간이 가진 불완전성이라는 전제조건이 아닌, 결과로 둔갑시킵니다. 누구도 뛰어나서는 안된다는 하향평준화는 남들과 다른 재능과 의견을 '전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근거가 됩니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남들보다 뛰어나고, 권력을 가지고 싶은 욕망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마치 덕으로 위장하여 우리를 억압합니다. 권력자에게 평등은 뛰어난 인재가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협을 막아주는 훌륭한 방어책이며, 소시민들에게 평등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게 만들어주는 뛰어난 행복의 술책입니다. 하지만 위장된 덕은 다음 세대에서 그 정체가 폭로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침묵한 것, 그것은 아들에게서 발설되기 마련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폭로된 비밀임을 나 때때로 발견했다.
sunofmoon_169334_1[209996].jpg 총에 맞아 쓰러진 대학생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

2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독일을 재건하기 위해 당시 독일인들은 라인강의 기적과 같은 경제적 회복에 주로 몰두했고, 나치 체제 하에서 그들이 행했거나 방조한 죄과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했습니다. 1967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며, 베를린을 중심으로 정치적, 교육적 개혁에 대한 요구가 커져갔습니다. 1968년 5월로 대표되는 유럽의 '68 혁명'의 정신은 1967년 6월 2일 독일 베를린의 한 대학생의 죽음에 의해 이미 촉발되었습니다. 이란의 마지막 샤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방문에 반대하던 벤노 오네조르크는 경찰과 이란 정보기관의 진압과정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성세대에 대한 자녀 세대의 불만은 폭발했고, 그들은 부모 세대에게 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숨긴 '죄의식과 비겁함'은 자녀 세대에서 급진적 정의감과 기성 질서에 대한 파괴적 분노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향해 "나치 쓰레기"라고 비난하며 기성 질서 전체를 부정했습니다. 일부 젊은이들은 과격한 방식으로 대항했고, 그들은 아버지가 가졌던 '나치적 폭력성' '극좌적 폭력성'으로 바꾸어 되돌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치즘'이라는 타란툴라의 독을 품었다면, 아들은 그 독을 정화하는 대신 '복수'라는 또 다른 독을 품고 타란툴라가 된 격입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위선을 세상에 폭로하는 가장 잔인한 거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960px-George_Frederic_Watts_-_The_Minotaur_-_Google_Art_Project.jpg <미노타우르스>, 조지 프레데릭 왓츠, 1885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미노타우르스의 비극은 그의 아버지인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위선에서 비롯됩니다. 미노스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하얀 황소를 빌리고, 이후 다시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평범한 황소를 바쳤고, 포세이돈은 그의 기만을 응징하기 위해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가 하얀 황소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파시파에는 반인반수인 미노타우르스를 낳게 되고, 아들은 왕이 지은 죄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되고 맙니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미노스는 궁전의 지하에 미궁을 만들어 미노타우르스를 가둡니다. 자신의 위선으로 태어난 아들은 '잔인한 거울'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는 폭력의 상징이 됩니다.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왓츠는 순수함과 순결함을 상징하는 작은 새가 미노타우르스의 왼손 아래에 짓이겨져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림 속의 미노타우르스는 바다 멀리에서 자신의 먹이가 도착할 것을 악의 없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독하고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이 괴물은 윗세대의 도덕적 타락이 자식 세대에 얼마나 기괴하고 고통스러운 유산으로 남겨지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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