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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17. 2024

시간의 비밀과 시간여행법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대한 해석 #2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비현실적인 방식을 통해 스토리가 전개된다. 현실에서 주인공 길은 공상가, 망상가 취급을 받던 중 그가 그토록 바라던 예술가들이 가득한 곳으로 시간여행을 한다. 반면 그의 약혼녀 이네즈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현재적 가치로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현재 얼마만큼의 가격인지,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 그녀에게 현재에 있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녀가 골동품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도 과거에 대한 낭만과 향수보다는 현재의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것, 즉 수집과 보존보다 사용과 경제적 지표를 위한 것이다. 반면 길은 대부분의 가치를 과거에 둔다. 이네즈가 현재 파리의 사교계를 떠도는 동안 길은 100년 전 파리의 유명인들을 만난다. 길은 이미 그가 만난 인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만나기 전부터 그들과의 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의 시간여행은 파리에 오기 전부터 늘 해오던 일이다. 과연 시간과 시간여행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할까?


시간의 비밀

실제로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닐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식될 뿐이고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들의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다른 주체들과의 상대적 관계를 통해 인식된다. 간단히 말해서 결론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위치, 속도 등등의 물리적 지표에 따라 다른 시간이라고 인식될 뿐이라는 이야기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잠정적 결론이다. 이러한 생각을 철학자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전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과거는 기억, 현재는 관조(혹은 관찰) 그리고 미래는 기대(혹은 희망)이라고 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어떠한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주체의 태도 혹은 상태를 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기억과 기대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과학적으로는 크게 의미 없어 보이는 예지몽을 예로 들어보자. 예지몽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꿈으로 본 것이다. 그 말은 꿈에서 깨는 순간 우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사건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상한 말이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형식으로 이야기하면 '미래를 과거한 것'이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고 예지몽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 없는 논리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로 느끼는 것과 미래로 여기는 것은 복잡한 관계를 통해 인식되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 혹은 관조는 어떤가? 관찰은 '현재에 하는 것'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물리학적으로 정밀한 고찰을 해보자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출발한 빛이 나의 망막에 부딪히고 시신경을 통해 전달된 전기신호가 뇌로 전달되어 어떤 사물임을 인식하는 과정을 겪는 것이 관찰이다. 하지만 과거에 출발한 빛이 나의 머릿속에서 과거에 인식되었던 것을 불러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관찰은 과거에 대한 재인식과 다르지 않다. 거꾸로 생각하면 모든 기억은 현재의 관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관조의 현재에 포착되지 않은 것은 과거의 기억에 존재할 수 없다.  


과거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재였고 그것을 불러오는 것 역시 현재이다. 미래라는 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현재의 기대, 즉 현재 관조하고 있는 것의 연장선에 대한 예측이다. 이처럼 철학자들의 사고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인식의 주체가 겪는 변화를 정리하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수스 전투 (알렉산더 전투>,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1529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 장면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 장엄하고 거대한 스케일(158cm x 120cm)의 이 그림은 전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화가는 여기서 전투가 결정되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화면의 가운데 긴 창을 들고 황금 갑옷을 입은 알렉산더 대왕이 세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도주하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를 쫓고 있다. 이 그림에서 특별한 시간적 묘사는 그림의 왼편 윗부분과 오른편에 위치한 달과 해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전투가 달과 떠오르는 태양의 시간만큼 지속되었다는 점과 몰락하는 동방의 페르시아와 떠오르는 알렉산더의 세력교체와 시대전환을 표현한다. 우리는 등장하는 수많은 인파와 그들의 움직임, 생동감을 통해 현장감을 떠올릴 수 있고 그 장소와 시간에서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 이 그림에는 다양한 시간이 존재한다. 그림을 그린 알트도르프는 16세기 독일에서 태어나 활동한 작가로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품들 역시 알렉산더 시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뒤편에 보이는 산 위의 로마네스크식 건물은 알렉산더 사후 1300-1500년은 지나야 등장할 건물이고, 오른편 뒤쪽의 도시를 구성하는 고딕 건축물들은 그보다 조금 더 지난 후에나 등장할 수 있다. 화가는 역사적 사건인 이수스 전투를 떠올리기 위해 자신의 동시대인들의 몰입을 위해 가장 익숙한 가까운 과거의 흔적들을 등장시킨 것이다.


사건과 시간

미술사에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그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가령 성경의 내용을 한 화면에 표현하는 것은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이들에게 성경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보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상상력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시간의 또 다른 정의를 이용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건'을 중심으로 한 시간 정의이다. 시간은 '전후'의 관계로 드러난다.

시간과 공간은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사고체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시간의 강물이란 것은 없다. 시간은 당장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질서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것들의 일반적인 순서이다.


라이프니츠는 시간을 변화와 순서로 바라본다. 알트도르퍼의 그림이나 성경의 내용을 그린 그림들 모두 각각의 사건들의 순서들을 떠올릴 수 있는 장면들의 연속이 있고 그 가운데 일부를 그리거나 각기 다른 시간들을 한 폭의 그림 속에 녹여낸다.


천체물리학은 우리가 과거만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하늘의 별들과 태양, 달 나아가 눈앞에 있는 대상들까지도 모두 이미 지난 과거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에게는 현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시간의 비밀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길이 마지막에 깨닫는 비밀 "여기에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시간여행의 의미

시간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다양하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선택을 바꾸고자 하는 반성과 후회의 시간여행도 있고 과거의 어느 지점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통한 관찰적 시간여행도 있다. 또한 if적 시간여행도 있는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다. 이러한 시뮬레이션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래를 대비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종류의 시간여행은 '시대'로의 여행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한다.

또 다른 시간여행의 종류로는 특정 인물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 괴테를 만나서 나누고 싶은 대화, 지금의 세계에 대해 니체는 어떻게 생각할까? 등등의 것들은 특정 인물의 생각과 의견을 듣고자 함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은 기계적 시간과 경험의 시간을 나누고 '진짜' 시간에 대한 가치를 평가한다.

'지속'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 이 흐름에 따라 생명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으로서의 시간, 의식으로서의 시간은 내가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진짜' 시간이지만, 체험이 배제된 기계적 시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베르그손의 경험적 시간의 의미와 같이 시간여행은 '다른 시간에 대한 감각적 경험'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여행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시간여행의 방법

시간여행의 의미가 '체험적 시간'을 겪는 것이라면 우리가 체험하는 행위와 체험을 의식하는 것에 시간여행의 비법이 있다. 이러한 '체험'은 지식을 쌓는 것과는 다르다. 지식은 인간이 보편성의 획득과정에서 얻어낸 공통의 과정과 결과물인데 '체험'은 개개인이 겪는 형식이 같더라도 결괏값 혹은 결괏값에 대한 감상은 각기 다르다. 체험은 '해석'을 거쳐 개개인의 삶에 각인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길이 그토록 1920년대를 가고 싶었던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들, 그 가운데서도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헤밍웨이는 길에게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의 책이 좋은 책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그의 책이 정직하기(honest) 때문이다. 우디 앨런은 작가의 이름 어네스트와 정직함의 어니스트의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소소한 유머를 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자신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는 투박하고 강한 소설이다.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우리는 헤밍웨이의 일부를 '체험'할 수 있다. 작가의 말투, 생각, 습관 등등을 느끼고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그 자신의 대답도 들어볼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불러오는 현재로의 시간여행 (혹은 소환의식) 또는 우리가 그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체험'은 그것을 겪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괴테는 그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공작)은... 내 마음보다는 내 지성과 재능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내 마음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오직 그것만이 모든 것의 원천, 즉 모든 힘과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아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지식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과거는 잿빛과 같다. 정합성과 정밀성으로 구성된 과거에 내가 발 디딜 곳은 없다. 우리는 구경꾼으로서 그 시간을 관람할 뿐이다. 하지만 '체험'을 통해 생긴 '나의 마음'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와 나만의 공간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것이 시간여행의 방법이다. 지식으로 스케치 한 그림에 채색을 하는 것은 감정과 상상력이다. 보다 생동감 있는 나만의 시간여행은 예술 작품에 대한 정보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을 통해서도, 우디 앨런의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서도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대화를 걸어온다. 때로는 지나치게 마초적이고 때로는 과도하게 솔직하며 때로는 너무나도 용감한 그는 영원한 시간여행의 비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헤밍웨이: 죽음이 두려우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네.

길: 가장 큰 두려움일 거예요.

헤밍웨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누구에게나 그럴 거야.


예술가들이 영원한 시간여행을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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