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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03. 2024

최고의 지혜, "나는 아무도 아니에요..."

영화 <트로이>에 대한 해석 #3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역할을 한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처럼 보인다. 그는 가장 용맹하고, 가장 반항적이며, 가장 흔들리고, 가장 고뇌하는 인간이다. 그는 누구보다 사랑 앞에서 스스로를 내려놓을 줄 알았으며, 우정 앞에서 분노할 줄 알았다. 그는 이러한 모든 인간적인 면을 보유한 신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상대의 영웅 헥토르를 무찔렀으나 트로이의 성문을 연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 순간 그는 어디에 있었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쟁터 한가운데서 영원으로 소멸했다. 북유럽의 신화에서 모든 전사는 발할라 (Walhalla)로 가기를 바란다. 발할라의 입장 자격은 '전쟁 중에 죽을 것'이다. 부상을 입고 전쟁 후 병상에서 죽는 자는 발할라에 입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신화는 전쟁 중 부상병으로 남느니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고자 하는 자발적 희생을 이끌어 냈다. 이 전쟁 신화는 부상병이 발생할 경우에 잃어버리는 병력 손실을 최소한으로 만들어주는 실질적 효과를 보인다. 부상병이 하나 생길 때 그를 돌보는 인력은 전투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전투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은 참전의사와 자기희생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주인공 아킬레우스를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고 통수권자인 아가멤논과 이 불세출의 영웅은 전쟁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외에는 마음을 나눌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의 명령에 따르기를 원치 않았던 이 영웅이 트로이아에서 활약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닌 한 인간의 지혜 때문이다. 그는 '화가 난 자'이다. 이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오디세이아>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5권이 되어서이다. 그의 이름은 오디세우스 (Odysseus), 라틴어로는 율리시스 (Ulysses)이고 <오디세이아>는 그의 여행기이다.


'화가 난 자'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는 고대 그리스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작은 섬 이타카의 왕이다. 여러 설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전령의 신이자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 (Hermes)이고, 그의 아버지는 너무 현명하여 신들조차 속인 시시포스 (Sisyphos)이다. 그의 이름은 '분노하다'/'화가 나다'인 '오디소마이 (odyssomai)'인데 현명한 자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 상황에 대해 늘 불만족스럽고 화가 나며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타인을 속이기 때문에 화를 이끌어내기에 이러한 이름을 부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기여하는 방식은 다른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이익관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약소국인 이타카의 왕으로서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라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던 그는 (일리아스에서는 헬레네를 둔 맹세 때문이었다) 이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야만 했고, 승리의 열쇠는 최고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킬레우스를 반드시 전장으로 이끌고 나와야 했으며 그것을 위해 아킬레우스의 욕망버튼을 누른다.

영화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조카인 파트로클레스를 누구보다 아낀다. <일리아스>에서는 둘도 없는 친구로 나오는데 영화는 몰입을 위해 가족으로 각색한 듯하다. 자신의 조카를 훈련시키는 아킬레우스 앞에 오디세우스가 등장하여 적국인 트로이아의 장군인 헥토르를 칭찬하기 시작하자 파트로클레스는 관심을 보인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의 의도를 알아차리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숨길수는 없었다.


파트로클레스: 헥토르는 정말 잘 싸우나요?

오디세우스: 트로이 최고의 전사지. 그리스 최고라고도 해.

아킬레우스: 그런 술수 쓰지 마요.

오디세우스: 자넨 칼이, 난 술수가 무기야. 각자의 무기를 사용해야지.... 역사에 기억될 거야. 이 전쟁도, 싸운 영웅도...


오디세우스는 기록상 술수로만 싸우는 나약한 꾀돌이는 아니다. 아킬레우스를 제외하면 그를 상대할 영웅이 없었다고 할 만큼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최고의 무기는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의 질투심과 영원에 대한 갈망을 정확히 읽고 있었기에 역사에 기억될 전쟁과 영웅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영화에서 오디세우스의 등장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나 중요한 시점에 등장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이야기를 극적으로 진행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여사제인 브리세이스와 사랑에 빠지고 (일리아스의 크리세이스와 브리세이스를 합친 캐릭터로 보인다), 아가멤논과 이 여인을 두고 갈등을 빚자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참전하지 않고 그녀와 전장을 이탈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때마침 기습을 감행한 트로이 군에 의해 자신이 애정하던 파트로클레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주를 입고 전장에 나섰다가 주검으로 돌아오자 아킬레우스는 다시 분노한다. 오디세우스는 세상을 간단한 논리로 이해하려는 아킬레우스에게 복잡한 정치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자신이 영원히 기억되는 것만이 목표인 아킬레우스와 달리 오디세우스는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들의 투쟁을 인정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세에 따른 지혜를 이야기한다. 그의 지혜는 ‘사회 속에서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개인’에게 최고의 지혜를 선사한다.


"나는 아무도 아니에요..."

영화에서 오디세우스의 첫 등장은 병사들이 그를 찾는 장면이다. 그는 언덕 위에 앉아 있는데 병사들에게 자신이 오디세우스라는 것을 숨긴다. 자신을 은폐하는 것, 그것이 그의 첫 등장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자신을 누구보다 조롱하고 냉소적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병사: 당신은 왕을 믿지 않는군.

오디세우스: 왕이라고? 면상에 한방 날려 주고 싶어요. 그는 내 마누라를 손대고, 그녀를 눈물 속에 빠트리고.


오디세우스의 은폐는 첫째로, 자신에 대한 객관적 태도를 취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냉철한 비판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시선, 관점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다.


오디세우스의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그가 외눈박이 괴물의 섬 퀴클롭스(Cyclopes)의 섬에서 탈출한 것이다. 트로이 전쟁 후 고향 이타카로의 귀향길에 오른 그는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 많은 사건에 휘말린다. 퀴클롭스의 섬에서 그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의 주인을 보고자 하는 욕망에 일행 모두를 위기에 빠뜨린다.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무스에게 잡힌 그들은 동굴에 갇히게 되고 폴리페무스는 일행 가운데 둘을 먹어치운다. 문제는 폴리페무스가 외출 시 혹은 귀가한 후에 동굴의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아둔다는데 있었다. 괴물을 죽이더라도 나갈 수 없는 상황, 출구가 없는 아포리아(aporia)의 상태이다. 그들에게는 테세우스를 도왔던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은 것이 필요했다. 아리아드네와 같은 조력자가 이 섬에는 없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누구인가? 현명함으로 치자면 신들까지 속여버린 시시포스의 자손이다. 그는 여기서 최고의 지혜를 꺼낸다. 그것은 "나는 아무도 아니에요...(outis)"이다.

<폴리페무스의 눈을 멀게 하는 오디세우스>, 펠레그리노 티발디, 1756

폴리페무스가 잠든 사이 괴물의 눈을 찌른 오디세우스는 잠들기 전 자신의 이름을 "우티스(outis)"라고 소개했다. 우티스는 '아무도 아닌', 즉 노바디 (nobody)라는 뜻인데, 눈이 찔린 폴리페무스가 다른 괴물들에게 자신을 찌른 이의 이름을 알려주지만 그의 대답이 "아무도 아니야..."였기 때문에 다른 괴물들은 폴리페무스가 스스로 눈을 찔렀거나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속인 대상이 외눈박이 괴물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하필이면 왜 호메로스는 그를 위협하고, 그가 극복한 대상을 '외눈'을 가진 괴물로 그렸을까? 어쩌면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가, 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지혜를 '외눈'으로부터의 승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디세우스의 승리는 '고정된 자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승리이며,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 극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은폐와 자기 극복

오디세우스는 그의 조상들과 같은 신성이 없다. 교묘한 술수와 계책을 사용하지만,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선지자적 자기희생이 동반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자기 자신’이다. 그는 온전한 인간, 독립적 개인의 상징이다. 그의 여정을 그린 <오디세이아>는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문제에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아놀드 뵈클린, 1883

오디세우스가 눈을 찌른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바다의 신의 아들을 상처 입힌 자를 포세이돈이 가만히 둘리 없었다. 이후 바다에서 평안한 항해를 할 수 없던 그는 여신 칼립소의 섬, 오귀기아(Ogygia)에 도착한다. '감추는 자' 혹은 '가리는 자'라는 뜻을 가진 '고귀한 여신'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의 눈과 귀를 가리는 매력을 가졌다. 그녀는 그가 그녀의 곁에 머문다면 영생과 풍요를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오디세우스는 그녀의 섬에 머무는 7년 동안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가려지고 감춰진 삶을 보내게 된다. 아놀드 뵈클린이 그림에서 오디세우스를 흑백의 덩어리처럼 그린 것도 그를 일부러 알아보지 못하는 '망각된' 존재로 표현하고자 함이다.


오디세우스의 현명함은 은폐를 통해 자기 극복을 이루어냈는데서 그의 아버지를 능가한다. 시시포스는 자신의 현명함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영원한 반복'이라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그의 지혜로 신들을 속였으나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의 지혜 속에 살았으며, 그 지혜의 크기는 신들을 능가했다 하더라도 자기를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했다. 자신을 ‘무’의 상태로 되돌리는 선택을 하여 스스로를 과시하는 방법 대신 은폐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가 트로이 전쟁에 참여를 강요받은 것은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얻기 위해 맺은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이 트로이아의 파리스로 인해 위기에 처하자 그녀의 남편인 메넬라오스는 참전을 요구했다. 그는 이 위기 상황에서 미친 척 연기한다. 스스로를 부정하려는 그의 첫 번째 선택은 미친 척, 즉 자신의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타카로의 귀환길에서 칼립소의 섬에서 머문 시간 동안 수동적이긴 하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하여 그가 얻었던 한 나라의 왕, 한 여인의 남편,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모든 지위를 다시 쟁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그가 가진 이름이 아닌 그가 살아온 모든 날들의 지혜와 힘을 통해 입증되는 것임을 보인다.


소크라테스적 영웅,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가 보이는 은폐의 기술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신이 가진 본성, 즉 불변의 진리의 비유로서의 신성과는 다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 극복의 존재이다. 이것은 영원한 자기 극복의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숙명은 죽음이고, 죽음 앞에서의 인간은 단 한 번의 삶을 산다. 신들과 같은 부활이 없는 인간은 단 하나의 삶 속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게 되고 그때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과거의 자신을 극복해야만 한다. 오디세우스의 지혜는 이런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지'는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거대한 지혜이다. 이러한 성장의 지혜, 발산적 지혜는 결국 자신의 세계의 무한한 확장을 전제로 한다.


가장 낯선 자, 그것은 '나'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을 금의환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되돌아오는 길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영광을 실현케 하고 그를 영원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전쟁의 숨은 승자는 오디세우스였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영웅들과의 전쟁터에서보다 항해 중에 겪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가 말하는 "나는 아무도 아니다"는 스스로를 은폐시키고 관찰하는 제3의 눈을 장착했음을 의미한다. 스스로에게 가장 낯선 이. 그것은 우리 자신임을 오디세우스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숱한 곡절을 겪고 고향 이타카에 도착한 우리의 영웅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숨겨야 했다. 아내 페넬로페가 20년 가까이 비어있는 왕의 자리를 노리는 구혼자들에 둘러싸여 새 왕을 고르기를 강요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숨긴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숨긴 상태로 자격을 증명하고 정당한 왕위를 수복한다. 새로운, 하지만 원래의 옛 왕은 고향 이타카를 떠났던 그가 아니다. 시간은 20여 년이 지났고, 아들은 장성했으며, 아내는 남편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20년 전 이타카의 왕은 낯선 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의 이름을 공개할 때 그는 다시금 위기에 빠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폴리페무스의 손을 벗어나면서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의 이름을 ‘탈은폐’시키자 그는 자신의 아버지 포세이돈의 저주를 오디세우스에게 내리게 한다. 또한 귀향 후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구혼자들을 처리하자 그 유족들에 의해 마지막까지 위기에 처한다.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인생무상'이라는 허무한 결론만은 아니다. 무상할 정도로 인생은 늘 변화한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아 보이는 '나'는 어느 순간 '가장 낯선 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낯선 자신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정체한 존재로 가두고 싶어 한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자신을 만들려고 한다. 가장 '이해받기 쉬운' 자신을 만들려고 한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에게 서운함을 느끼며, 타인에게 가장 이해받고 인정받기 쉬운 자신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오디세우스와 시레네>, 존-윌리엄 워터하우스, 1891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 (Theodor Adorno)와 호크하이머 (Max Horkheimer)는 <계몽의 변증법> ("Dialektik der Aufklärung")에서 시레네의 바다를 지나는 오디세우스의 배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레네의 음악을 들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노동을 하는 선원들은 귀를 막고 음악을 듣지 못하게 하고, 명령을 하는 오디세우스는 음악을 듣지만 행동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돛대에 묶었다. 아도르노는 '죽음'과 '행복' 둘 모두에 적대적인 이 상황에 대해 비판한다. 욕망하지 못하는 선원과 욕망하지만 무기력한 오디세우스. 이 둘은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행복도 피해버리는 어리석은 이성의 한계(도구적 이성)를 드러낸다. 각성하지 못한 오디세우스는 반쪽짜리 지혜였다. 갖은 고난을 겪은 후 나머지 반쪽을 찾은 오디세우스에게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가장 낯선 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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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에 대한 해석 완결. 다음 시간에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대한 해석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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