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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10. 2024

당신이 가장 사랑한 시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대한 해석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미국의 코미디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Allen Stewart Konigberg)의 작품이다. 작가로서의 역량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영화에서 인물들의 대사는 유머와 위트뿐 아니라 시대와 인물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가득하다.


제목인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알 수 있듯 배경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이다. 그리고 시간은 미드나잇, 자정이다. 제목에서부터 시간과 장소가 특정된다. 그리고 이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통해 주인공 길 펜더는 다른 시간대의 파리를 경험한다.


어디에도 없는 도시

영화가 시작하면 파리의 경치와 함께 음악이 흐른다. 음악은 시드니 베셋 (Sidney Bechet)의 <si tu vois ma mère>라는 곡으로 뜻은 <네가 내 엄마를 본다면>이다. 이 곡의 가사는 영화 전체와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재즈풍의 이 노래는 엄마에 대한 기억과 향수를 노래한다. 그리고 과거는 바뀔 수 없고, 인생이라는 여행을 하는 동안 과거에 대한 기억은 동반자와 같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내용을 노래한다. 영화는 이 음악과 함께 파리의 곳곳을 보여준다. 우리가 파리를 파리로 부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베르사유 궁전? 노트르담 성당? 루브르 박물관? 개선문? 오르세 미술관? 오페라 갸르니에? 몽마르트르 언덕? 대부분 파리하면 '장소'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파리는 하나의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다음의 대사와 함께 시작한다.


길: 이런 도시는 어디에도 없어. 과거에도 없었고...

이네즈: 꼭 와본 사람처럼 말하네.

길: 비 올 땐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1920년대의 파리를 상상해 봐. 비에 젖은 파리에서 화가들, 작가들이...

이네즈: 비 오면 좋을게 뭐야? 젖기 밖에 더해?


주인공 길과 이네즈는 약혼을 한 사이이다. 이 둘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사랑과 무관심이 어떤 인식으로 드러나는 지를 알 수 있다. 길은 파리를 사랑한다. 그가 사랑하는 파리는 맑고 쾌청하며 정리정돈 되어있고 편리한 현대식 시설로 가득한 곳이 아니다. 이네즈는 파리를 여행지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그녀는 골동품을 사고 사교활동을 즐기는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활동에 방해가 되는 '비 오는 파리'는 '불편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길의 말처럼 파리는 파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불린다.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 귀스타브 까이유보트, 1877

19세기말의 파리를 그린 까이유보트의 그림은 이전의 미술사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모두가 비슷한 옷과 우산을 쓰고 있으며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이고 뭐 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주제가 무엇인지 오랜 시간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풍경은 이러한 생소한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비슷한 옷차림으로 하나의 도시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습이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파리라는 도시의 어떤 부분에 매료되어서 이곳으로 모였을까? 대부분은 일자리 때문에, 누군가는 낭만과 분위기에 취해 이 도시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도시 파리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시대에 따라 변함을 보여준다. 또한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았던 여러 예술가들 각자가 생각하는 가장 사랑하는 시간들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유럽의 도시들을 대표하는 건축물들

많은 도시는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는데 위의 그림과 같이 하나의 건축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저 건물이 사라지면 저 도시들의 이미지는 점차 흐려지는 것일까? 건물이 아니라면 저 도시들을 각자의 도시들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어디에도 없는 도시>는 어떻게 생겨날까?


길이 파리가 어디에도 없는 도시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로마는? 런던, 베를린, 마드리드, 빈 등등의 도시는 어떨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어디에도 없는 도시>가 아닌 도시는 어디에도 없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어디에나 있는 도시"는 없다. 도시는 그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조합들이 고유하다. 더욱이 매우 닮은 형태의 도시라 할지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르다. 도시는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며,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물리적 공간에 사람이 머물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유무형의 문화들이 복합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도시이다. 감독 우디 앨런은 이러한 도시들의 고유한 모습을 관찰하기를 즐겼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파리뿐 아니라 맨해튼(1979), 투 로마 위드 러브(2012),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18)과 같이 여러 도시들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환상으로 어디에도 없는 도시들을 가지고 있다. 때론 도시에서의 기억이, 때론 도시에 대한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들이, 때론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한 들은 이야기들로 여러 도시들은 우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어떤 도시가 여느 도시와 다름없이 느껴진다면 그 도시가 특색이 없는 것이라기보다 내가 그 도시에 애정이 없다는 것, 그 도시에 대한 내 시선이 무관심하다는 것일 터다.


파리의 유명 건물들

시간 속의 도시

우리가 파리를 기억하는 방식은 어떨까? 위의 그림과 같이 여행지도 위의 몇몇 유명한 건축물 혹은 맛집들을 단순화된 도식과 같이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는 그것을 이 도시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머릿속에 파리는 늘,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같은 모습의 그것인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머물러있는 불변하는 모습이 아니라 늘 변화하고 움직이는, 성장하고 몰락하고 또다시 성장하고 몰락하고를 반복하는 상태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혹은 도시든 늘 변화한다. 그것들을 사랑하는 우리도 변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상과의 사랑에서 변했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랑의 주체인 내가 변한 것일까? 사랑을 받는 객체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를 둘러싼 주변과 세상이 변한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모두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 한다면 낡아빠진 플라토닉 사랑일지 모른다. 그런 것은 없다. 내 관념 속에 자리 잡고 변하지 않는 영정사진과 같은 그것을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회색빛의 지루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사랑은 형형색색의 것이 나의 의지와 예상을 뛰어넘어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역동적인 것이다.

길은 파리의 시간 가운데 1920년대를 유독 사랑한다. 그 시대의 분위기, 예술가, 작가, 음악 등등의 모든 것을 동경한다. 하지만 길이 1920년대 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길과 아드리아나는 파리의 낮과 밤 중 어느 것이 더욱 예쁜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드리아나: 파리는 낮과 밤 중 언제나 더 예쁜지 못 고르겠어요.

길: 당연하죠. 못 골라요. 양쪽 다 만만치 않거든요. 가끔 생각해 봐요. 그 어떤 책이나 그림, 음악이나 조각품들이 위대한 도시에 비할 수 있을까. 없어요, 둘러봐요. 모든 거리가 각각 하나의 예술품이에요. 생각해 봐요. 이 황량한 우주 속에 파리가 존재한다는 거. 또 이 불빛... 목성이나 해왕성에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근데 저 우주에서도 이 불빛은 보이죠. 카페들, 술 마시고 노래하는 사람들. 파리는 우주에서 가장 열정적인 곳이라고요.

아드리아나: 시인이시네요.


길은 파리를 죽은 이들의 흔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어떤 책이나 그림, 음악이나 조각품들과 도시가 다른 점은 도시는  '아직 이용 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것이 도시 그 자체이다.


도시는 시간의 지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이다. 물론 이 흔적은 흉터와 같이 시간이 지나도 크게 남아있는 것과 작게 남은 것 그리고 거의 남지 않거나 지워진 것도 있다. 인위적으로 지워진 것과 자연적으로 덮인 것까지 말이다. 때론 모두 지워져 기록으로만 남은 경우가 이 도시에 대한 상상을 또렷이 남기기도 한다. 이전 글에서 다룬 <트로이>가 대표적 예이다. 도시 파리는 수많은 시간의 흔적이 문서적 기록과 고고학적 흔적 그리고 역사적 유적들이 보존과 재생을 통해 조화를 이룬 도시이다. 영화에서도 그다지 큰 세트 없이 다양한 시간을 재현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우리는 도시 파리에서 다양한 시간으로의 여행을 할 수 있다. 주인공 길은 그가 가장 사랑한 작가 헤밍웨이와의 만남을 현실 시간에서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것은 그의 글을 통해서 이다.


내가 가장 사랑한 시간... 현재 (carpe diem)

길은 자신의 향수를 "1920년대 비 오는 파리"에서 찾는다. 그가 1920년대에서 만난 아드리아나는 벨에포끄 (Belle epoque)인 1890년대를 그리고 그들이 만난 화가 고갱과 드가는 르네상스를 가장 사랑하는 시간으로 꼽는다. 아드리아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길은 그녀와의 시간 여행 중 문득 깨닫게 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이 모든 시간의 아드리아나가 아니라 아드리아나가 살던 시간 속의 그녀였음을. 그녀는 그에게 그 시간(1920년대)을 인식하게 해 준 책갈피 같은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의 만남에서 그녀의 책갈피를 찾아 떠나고자 한다. 그와 그녀의 공통점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절보다 앞선 페이지를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길은 자신의 향수가 어디서 발생했으며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깨닫게 된다.


"이제야 알겠어요. 내 꿈속의 불안이 뭐였는지 설명이 돼요.... 페니실린이 다 떨어진 거예요. 또 치과에 갔는데 마취제도 없었고요. 이 시대엔 항생제가 없다고요.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기를.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족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프랑스인들은 삶의 지혜를 종종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C'est la vie!" (그게 삶이야!)이다. 길이 마지막에 하는 말처럼 삶은 원래 그렇다. 현재 가진 것을 보지 못하고 잃은 것만을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채워지면 또 다른 결핍을 찾아 다시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삶이다. 영화의 끝에 길이 깨달은 것은 현재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 현재의 결핍만을 바라보기에 과거만을 쫓는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다. 현재에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미래에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남길 뿐이다. 잃은 것만을 영원히 쫓는 것, 잃을 것들에 대해서 무신경한 것, 모두 잃을 것이라는 허무주의 이 모든 것들은 현재를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어리석음이다. 다시 말해 나의 현재의 불만은 과거의 황금기에 대한 추억이다. 언제나 과거의 한 지점만을 바라보는 이는 현재와 미래에 등을 돌리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과거는 기억이고 현재는 관조이며 미래는 기대이다.

기억과 기대만 갖고 사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것들을 바라볼 수가 없다. 망령과 망상에 눈이 멀어 현재의 모든 가치를 몰가치로 바꿔버린다. 길은 다시 현재의 파리로 돌아와서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바라본다. 그의 약혼자가 자신을 속인 것, 자신이 그녀에 대해 마음이 없는 것. 그는 현재를 바라보는 순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가브리엘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파리의 진정한 아름다운 순간은 비가 올 때라고 이야기한다. 골동품을 사랑하는 그녀와 100년 전의 작가를 사랑하는 그는 비가 오는 파리를 함께 걸을 준비가 되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아름다운 진리의 말,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을 그의 작품 <송시>에 남겼다. "오늘을 즐겨라"로 번역되는 이 말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바치는 것의 무의미함을 경고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크나큰 동경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 나의 영혼이여, 보다 사랑스럽고 포괄적이며 광대한 영혼은 오늘날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와 과거가 네게서보다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곳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니체는 영혼 역시 불멸과 영원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와 과거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유일한 곳, 다시 말해 우리의 영혼이 머무는 곳은 현재뿐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무수한 현재를 살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이미 지난"과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의 두 가지 형용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 길을 통해 우디 앨런은 우리에게 <가장 사랑하는 시간>을 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늘이자 현재이다.


다음 시간에는 시간 여행과 그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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