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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pr 19. 2024

불멸과 기억

영화 <트로이>에 대한 해석 #2

신화와 역사 사이

영화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내용을 주로 다룬다. 일리아스 (Ilias)는 트로이 전쟁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데 ilias라는 말은 일리오스(ilios)의 여성형 형용사이다. '일리온' (ilion)은 트로이아의 왕성으로 알려져 있고 이것의 형용사형의 의미는 '일리온과 관련된', '일리온에서 벌어진'의 뜻이 될 수 있으므로 '트로이아 전쟁에 대한 노래'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트로이 전쟁은 오랫동안 신화의 이야기로만 여겨졌다. 그 이유는 전해지는 형식이 역사서가 아니라 구전된 이야기의 모음이었고 게다가 트로이아의 유적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을 하지만 투키디데스는 있긴 했지만 과장된 이야기라고 평가를 조심스러워했다. 일리아스 이야기의 대부분에 신들의 개입이 이루어져 있는 것은 트로이아의 실질적 존재에 대한 확신을 점차 힘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1870년 독일의 상인 가문 출신의 비전문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 (Heinrich Schliemann)은 어린 시절 즐겨 읽던 일리아스가 사실이라 믿었고 성인이 되어서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활동이라 하기엔 거창한 트로이아 유적의 발굴을 시도하고 결국 발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신화'는 '역사'로 이행하게 된다.

트로이아는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해안가 도시였다. 당시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그의 동생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에게해 일대에 지배권을 행사했는데 트로이아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아가멤논과 동맹 맺기를 결정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기의 사랑꾼 파리스의 난입으로 이 동맹은 결렬되고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이 전쟁에는 고대그리스의 수많은 걸출한 영웅들이 등장하고 각 폴리스를 지지하는 올림포스의 신들 역시 개입한다. 그리스의 신들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것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후 극도로 줄어든다. 신화의 내용상 이전에 있었던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와 '기간토마키아'(Gigantomachia)를 통해 신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어 이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역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역사의 시대를 여는 이 전쟁의 원인에는 역시 주인공이 된 '인간'이 있었다.


막장 드라마

<일리아스>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Achilleus)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발이 빠른 자'라는 뜻이다. 고대인들은 사람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는 '지키는 자'이고 예수(Jesus)는 여호와를 헬라어로 '구원자'라 번역한 것이다. 현대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들의 이름이 그들의 운명이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막장 드라마의 시작은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를 관장하는 여신 테티스(Thetis)의 결혼으로부터 시작된다. "테티스는 아버지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아들을 낳는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예언은 그녀를 그 어떤 신과도 결실을 맺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출중한 미모 때문에 제우스는 그녀를 총애했으나 예언은 자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그의 아버지인 하늘의 신 우라누스(Uranus)를 능가했고, 자신 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를 능가했기 때문에 자신 역시 자신의 아들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을 키울 뿐이었다. 제우스는 그녀를 인간인 펠레우스와 인연을 맺어준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된 올림포스의 신들>, 코스마스 다미안 아삼, 만하임 성 천장화, 1728

그녀의 결혼식에 올림포스의 신들이 초대되었는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를 초대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에리스는 이 결혼식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작전에 돌입한다. 그것은 그녀가 가장 잘하는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림의 왼쪽 편에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가 제우스에게 황금사과를 가져다준다. 이 황금사과에는 불화의 씨앗이 적혀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결혼에 초대받은 올림포스의 여신 가운데 헤라와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가 나섰다. 하지만 제우스는 자신의 아내와 두 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고를 수는 없었다. 위의 그림에서 제우스의 앞에는 세 여신이 각자의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왼편부터 공작을 동반한 헤라, 쿠피도와 한쌍의 백조를 동반한 아프로디테 그리고 무구를 착용한 아테나이다. 여인 셋의 등쌀을 견디지 못한 제우스는 황금사과의 소유권에 대한 결정을 '가장 아름다운 인간' 파리스(Paris)에게 미룬다. 

<파리스의 심판> 페터 파울 루벤스, 1636

그림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목동이 파리스이고 그 옆에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있으며 그의 앞에 세 여신이 나체로 서있다. 오른편의 여신은 공작을 데리고 있는데 공작의 깃털에 있는 수많은 눈은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라는 괴물을 상징하는 '감시자'를 뜻한다. 바람피우는 남편에 적합하지 않은가? 가운데 있는 여신의 뒤편에 날개 달린 아이로 표현되는 사랑의 신 쿠피도(Cupido)가 보인다. 이 여신은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이다. 왼편의 여신은 그녀의 아버지가 선물한 아이기아스 방패와 투구를 곁에 두고 있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이다. 

여신들은 각자 공약을 내건다. 사실 로비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을 뽑아준다면 세상의 명예를 주겠다는 헤라와 사랑을 주겠다는 아프로디테,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겠다는 아테나. 그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이 스토리가 막장인 이유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인 헬레네라는 점이었다. 파리스가 유부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그녀를 자신의 조국 트로이아로 데려오는 사건은 전쟁을 막으려는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이 막장 드라마는 재미있게도 인과응보로 끝이 난다. 진부해 보일지 모르는 이 이야기를 호메로스는 잘 짜인 인물 간의 관계로 풍부하게 채워준다. 사건의 발단은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이었다. 여기에 분쟁의 여신을 초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크나큰 실수였다. 그들이 작은 화를 피하고자 했던 선택은 그들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이끌었다. 니체는 그리스 영웅들의 이야기를 '운명에 맞서는 것'이라 해석하기를 즐겼다.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에 도달하기 위해 니체는 '인간은 극복되는 것'이라고 한다.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회피가 아닌 도전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재앙을 피하려고만 한 그녀의 선택은 그녀의 아들을 비극적 운명으로 내몰았다. 그녀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예언과 같이 아버지를 아득히 능가한 전사로 자랐다. 아들을 불사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테티스는 스틱스의 강에 갓난아이였던 아킬레우스를 담근다. 야무지지 못했던지 그녀가 잡고 있던 발목에 강물이 닿지 않아서 단 한 곳의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을 '아킬레우스의 힘줄 (건)'라 부른다. 아킬레우스의 강한 능력은 그의 이름에 명시되듯 빠른 발이었고, 그것의 상실은 그의 죽음을 의미한다.

<어린 아킬레우스를 스틱스 강에 빠뜨리는 테티스>, 페터 파울 루벤스, 1630-35

그림에서 운명의 여신 라케시스가 횃불을 밝히며 아킬레우스의 비극적 운명을 걱정하고 있다. 배경에는 멸망의 상황에 놓인 트로이아가 그려져 있으며 그림 앞부분에는 저승을 지키는 케르베로스와 저승의 주인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의 조각이 위치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이유는 그가 아가멤논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인데 영화에서는 왕이 직접 나서 용맹을 보여주지 않고 뒤에서 욕심만 드러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전쟁에 참전하도록 설득한 이가 현명한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이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운명에 맞서는 삶을 택한다.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 전쟁에 그는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묻는데 테티스는 아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후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영화에서 테티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날이 올 줄 알았다.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난 알고 있었어. 네가 트로이에 갈 것을... 트로이에 가면... 영광은 네 것이 돼. 네 승리는 수천 년 노래될 거고, 세상은 널 기억할 게다. 대신 트로이에 가면 넌 못 돌아와. 네 영광과 죽음은 한 몸이니까...

아킬레우스는 유한한 인생의 행복보다는 무한한 영광을 선택한다. 그의 선택은 죽음이었고 죽음을 통해 영원이 기억되기를 택했다. 그는 불멸을 사랑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멸과 영원이 기억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적 보상이자 반목하기 쉬운 세대 간의 유대감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헌신, 즉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훌륭한 발명품이다. 

<아킬레우스의 죽음> 페터 파울 루벤스, 1630-35

전쟁에 참여한 아킬레우스는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헥토르를 무찌른다. 그는 트로이 함락에 가장 큰 전공을 세우지만 트로이아의 왕자이자 이 사건의 두 번째 책임자인 파리스의 화살에 약점을 공략당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테티스는 행복한 결혼식을 위해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초대하지 않았고 파리스는 제우스의 책임 회피를 위해 선택을 강요받았으며 유혹에 이끌려 자신의 욕망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자신의 국가를 전쟁의 위기로 내몰았고 이 전쟁에 참여한 것이 이야기의 시초가 된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였던 것이다. 테티스의 행복을 향한 선택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재앙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이야기에서는 인과응보의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신탁을 부정하려다가 신탁을 충실히 이행한 오이디푸스와 같이 테티스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지우기 위해 불행을 자초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사건에 대한 모든 판단을 자신의 인식 한계 속에만 두기 때문에 발생하는 관점적 한계를 지적한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필요한 상황이다.

유일하며 진실한 지혜는 바로 당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지'는 인간의 관점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아집과 독선에 찬 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자신은 불안에 사로잡힐 때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불안만을 바라보고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하나의 관점에 갇혔기 때문에 발생한다. 


또 다른 불멸

아킬레우스의 불멸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지금도 아킬레우스의 이름은 각종 대중 매체에서, 게임에서 심지어 우리의 신체 부위에도 살아있다. 가장 완전한 능력을 가졌던 인간이었던 아킬레우스는 그가 가진 신적인 능력과 반대되는 불완전한 존재, 인간이라는 모순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불멸에 대한 사랑은 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그는 남길 것만을 생각하고 불멸의 방법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수동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의 불멸은 그의 삶이 끝나는 순간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한 호메로스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인물인 아킬레우스를 통해 자신이 겪어야 할 수많은 삶의 문제들을 미리 겪어본다. 단지 아킬레우스 만이 아니라 수많은 영웅들의 삶을 통해 자신이 겪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선택지를 체험해 본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체험이다. 니체는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쪽은 체험과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 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은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던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211절,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는 아킬레우스와 같은 목숨을 건 선택을 매번 할 수 없다. 우리가 불멸하는 방식은 이후에 기억되는 수동적 불멸이 아닌 수많은 삶들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으로 해석하는 능동적인 그것이야 한다. 기억을 뜻하는 memory라는 단어는 기억의 신 므네모시네 mnemosyne에서 왔는데 그녀는 기억의 샘을 관장한다. 사람이 죽어서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을 잃게 되는데 그녀가 관장하는 '기억의 샘물'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진리를 아는 것은 원래 알던 것을 상기(reminescense)하는 것' (상기설)이라 했다. '상기'는 다시 re + 기억하다 minisci의 합성어인데 그리스어로는 회귀 ana에 기억 mneme을 붙여 기억으로의 회귀 'anamnesis'라고 한다. 이후 하이데거는 진리를 망각의 강 레테(lethe)에 부정 접두어를 더한 알레테이아 'aletheia'라고 하여 진리를 '비망각상태', 즉 '기억'이라는 매개체로 설명한다. 진리에 대한 사랑인 철학 philosophia는 기억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불멸의 존재로 남은 아킬레우스는 '기억'을 통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의 불멸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 아모르파티 (amor fati)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것이 용기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것', 즉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 한다.

<시지프스> 티치아노, 1549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아모르파티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그러나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나는 왜 이렇게 총명한가' 中, 프리드리히 니체 -


다음 시간에는 영화 <트로이> 속에 나타나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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