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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pr 12. 2024

영원, 기억 그리고 사랑

영화 <트로이>에 대한 해설과 해석

2004년 초대형 블록버스터 <트로이>가 개봉했다. 소위 빵형이라 불리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을 맡아서 화제를 모았다. 영화 <트로이>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각색해 만든 작품이다. 눈먼 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자면 스티비 원더를 제외하곤 이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이다.

<호메로스의 신격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1827

호메로스 (Homeros)

앵그르가 그린 <호메로스의 신격화> (The Apotheosis of Homer)에서 호메로스는 승리의 여신 니케 (Nike)의 월계관을 받고 있다. 그의 뒤편에 있는 이오니아식 건물의 프리즈에는 <OMNIPOTENTIA> (전지전능)이라고 조각되어 있다. 호메로스 아래에 빨간 옷을 입과 옆에 칼을 두고 있는 여성은 그의 작품 <일리아스>의 인격화된 모습 (personification)이고 그 옆의 녹색 옷을 입고 있고 노를 가지고 있는 여성은 <오디세이아>의 인격화된 모습이다. 칼이 의미하듯 일리아스는 그리스의 영웅들이 펼치는 전쟁이 주된 내용이고 오디세이아는 노를 이용한 항해, 즉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인물들인데 그림의 오른편에 빨간 옷을 입고 망치를 들고 있는 인물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과 아테나 여신상을 계획한 조각가 피디아스 (Phidias)이고 그의 머리 뒤로 살짝 보이는 황금색 투구의 군인은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끈 정치가 페리클레스 (Pericles)이다. 피디아스의 뒤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이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을 확장시킨 알렉산더 대왕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그리스의 영웅들이 등장하는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의 주요 인물들 역시 발견할 수 있다. 뿐 아니라 앵그르는 호메로스의 유산을 이어받은 후대 작가들도 그려 넣었다. 단테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와 미켈란젤로, 라파엘과 같은 화가 역시 호메로스를 추앙하기 위해 등장한다.

호메로스의 눈을 보면 다소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드는데 이는 그가 장님임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문서에서 장님으로 기술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장님이 지혜로운 예언자로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타 문헌들을 보건대 그가 장님이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파르나소스>, 라파엘, 서명의 방, 1509-11

교황 레오 10세는 바티칸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서명의 방 Stanza della Segnatura)의 네 벽면에 라파엘의 작품을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라파엘은 동서남북 방향으로 철학, 신학, 정의 (법학), 시학을 주제로 한 벽화를 기획했다. 동측면에는 그 유명한 <아테네 학당>이 위치하고 북측면에 위치한 벽화가 <파르나소스>이다. 그림의 가운데 바이올린을 켜는 아폴론이 보인다. 아폴론은 음악, 시, 궁술, 빛, 의술, 역병을 담당하는 신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각기 맡은 분야가 있는데 한 가지만을 담당하지 않고 연계된 여러 분야를 두루 다룬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가 해안가에 위치한 아폴론 신전을 점령할 때 신전 앞의 신상의 머리를 칼로 치는데 여기서 신상은 활을 쏘고 있다. 이후 그리스 병사들에게 역병이 돌게 되는데 이 역시 아폴론 신의 권능이다. 

<서명의 방>

아폴론 신이 관장하는 음악은 디오니소스가 담당하는 음악과는 다른 장르이다. 아폴론의 음악은 이성적인 음악으로, 수학적으로 정확한 비례를 통해 구현되는 음악. 현의 길이와 두께에 따라 정확하게 조율되는 음악을 관장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의 음악은 즉흥적이고 감각적이며 본능적 음악이다. 벽화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한 푸른색 토가를 걸치고 월계관을 쓴 인물이 호메로스이다. 그가 장님인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라파엘이 살던 시기에 발견된 고대 그리스 최고의 걸작인 '라오콘 군상'에서 큰 감명을 받은 그는 호메로스의 얼굴에 라오콘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 학설은 꽤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보이지 않지만 또 다른 감각을 통해 호메로스는 그 누구보다 인간에 대한 통찰을 해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고대 세계의 인간들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전하려 한다. 그것은 "영원, 기억 그리고 사랑"이다.


영원, 기억 그리고 사랑

영화 <트로이>의 초입부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테살리를 정복하는 장면이다. 양군이 대치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인간은 영원을 갈망한다. 그래서 자문한다. 삶의 흔적은 남는 것인가? 훗날, 사람들은 기억해 줄 것인가? 우리가 누구이며, 얼마나 용감했으며, 또 뜨겁게 사랑했는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가진 궁극적인 두려움은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종교와 예술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소망과 의지의 표현이다. 죽음이라는 '상실의 상태'를 마주하기 두려운 인간은 가상의 상태를 상정한다. 그것이 '영원'이다. 영원 eternity는 라틴어의 aevum과 그리스어의 aion에서 왔다. 두 단어는 '시간', '삶의 시간', '영원', '생명력' 등의 뜻을 가진다. 인간은 '영원'을 갈망하지만 결국 생명의 시간이 꺼지는 순간 그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이 흔적이 물질적인 방식으로 남게 되면 유물, 예술품, 기록물 등이 되는 것이고 비물질적 방식으로 남게 되면 기억, 이야기 등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결국 인간이 '영원'에 도달하는 방식은 개인의 불사가 아닌 세대에서 세대로의 '전달'이다. 이 전달의 형식은 개인으로 성취할 수 없고 집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 영웅 혹은 한 집단의 삶의 의지가 전체로 전달되고 그것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 '전통' tradition이다. (라틴어 tradere는 전하다, 잇다의 뜻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전하고 전달받는가? 우리가 그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까? 우리가 그들의 삶 속에서 무엇인가 '동일한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에게 그들의 것이 전달되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정체성 identity 은 동일성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는 이 동일성을 자각하는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방식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추구했는지로 드러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나의 지향성과 의지'로 대답할 수 있다.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카라바조, 1602

카라바조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사랑의 신 아모르는 모든 것 위에 앉아 있다.  이 구절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그의 작품 <목가> (eclogae)의 

Omnia Vincit Amor et nos cedamus amori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하자)의 일부이다. 모든 것이란 음악을 상징하는 악기와 악보, 기하학을 상징하는 직각자와 컴퍼스, 천문학을 상징하는 천구의 (아모르 오른쪽 다리 뒤), 권력을 상징하는 왕관과 왕홀, 문학을 뜻하는 펜대와 책, 전쟁에서의 무력과 승리를 상징하는 갑옷과 월계관이 속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분과를 포괄하는 것 위에는 사랑이 위치한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지혜는 sophia이고 사랑은 philein이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유한준은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에 글귀를 남긴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인간은 사랑을 통해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그 관심을 통해 살피고 연구하여 그것의 진정한 혹은 숨겨진 부분을 밝혀낸다. 인간이 모은 지식과 지혜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리스의 신 가운데 사랑의 신으로 알려진 에로스는 가장 오래된 신 가운데 하나로 태초의 상태인 카오스에 작용하여 대지의 신인 가이아와 밤의 신 닉스를 낳았다는 설이 있다. 결국 고대 그리스인들이 바라본 창조적 인간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무엇에 대한 사랑으로 어떤 용기를 내어 스스로를 누구라고 남기고 싶어 했을까?

영화 <트로이>의 내용을 통해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 다음 주에는 불멸의 영웅 아킬레우스에 대해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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