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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r 29. 2024

'동굴'과 '터널'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 대한 니체적 해석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서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명백하다. 재난으로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거점 삼아 시간을 보내며 구조를 기다리는 것과 문명의 초입을 찾아 험준한 산을 오르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할 지의 문제이다. 전자는 우리가 익히 알듯 '골든타임'이 키워드이다. 구조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생존자들의 '골든타임'을 파악해 그 시간 안에 구출하느냐 못하느냐의 타임어택. 생존자들의 입장에서는 골든타임 이상을 최대한 버티며 구조자들의 노고에 응답하는 것. 후자는 실제로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며,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눈보라와 산사태가 기다리는 고난을 향해 나아가는 것. 어느 것이 올바른 결정일까?


'미리 아는 자'의 희생

판도라의 남편은 '이후에 아는 자' 에피메테우스이다. 사실 우리에게 알려진 티탄신은 그의 형 프로메테우스이다. 그의 이름은 '이전의, 미리'라는 뜻을 지닌 pro와 '앎, 배움'의 의미를 지닌 mathema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삶과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아킬레우스는 '발이 빠른 자'이고 알렉산드로스는 '수호하는 자'이다. 

<프로메테우스>, 페터 파울 루벤스, 1636-37

프로테메우스는 예지능력을 지닌 신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지 하는 것은 사건 전체의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예지가 아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의 일정 시간이 흐른 후의 일만을 예지 할 뿐이다. 따라서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일의 모든 미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시간의 신은 크로노스조차 불가능하다. 그리스의 신들은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그들조차 따라야 할 어떤 규칙이 있다. 

"In Prometheus wird dem Griechen gezeigt, wie die übergrosse Förderung menschlicher Cultur für den Förderer und den Geförderten gleich verderblich wirkt. Wer mit seiner Weisheit vor dem Gotte bestehen will, der muss wie Hesiod „das Mass der Weisheit “ haben."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인간 문화의 과도한 장려가 장려한 자와 장려된 자 모두에게 얼마나 해로운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준다. 자신의 지혜로 신 앞에 서기를 원하는 자는 헤시오도스의 말처럼 "지혜의 정도"를 갖추어야 한다.)

- <비극적 사고의 탄생>中, 프리드리히 니체 -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로부터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무계획의 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모든 동물에게 능력을 부여하고 인간에게 줄 것을 남겨두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도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대가로 코카서스 산에 묶여 자신의 살점을 뜯어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영화 속의 두 인물은 인육을 손질해 남은 생존자들에게 제공하는 임무를 자처했다. 시신을 마주하고 손질하는 모든 일을 도맡은 그들은 전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류애를 가진 프로메테우스의 후예이다. 남은 자들은 그들의 숭고함을 안다. 암울한 상황에서 도덕이냐 생존이냐? 그들은 생존을 선택했다. 생존을 선택했다고 비난하는 자도 없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은 묵묵히 거부할 뿐이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페터 파울 루벤스, 1611-12


인간의 가장 큰 능력은 이성을 이용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라디오라는 도구를 획득해 자신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구조활동을 멈추기로 당국은 결정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험준한 산을 향한 여정뿐이다. '미리 아는 자'의 희생은 더 이상 메시아의 재림을 보장하지 못한다. 니체의 말처럼 인간의 문화는 서로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서로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중력의 정령"을 만들어내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문화적 고상함 (강제, 율법, 곤경과 결과, 목적, 의지, 선과 악 등)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을 가능케 하는 어느 정도의 지혜이다.


'동굴'이냐 '터널이냐'?

이제 떠나지 않으면 그들에겐 느린 죽음뿐이다. 구조는 요원하고 생존의 불꽃은 서서히 꺼져갈 것은 '미리 아는' 능력이 있는 그들에겐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떠나지 않는다. 왜일까? 문제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두운 통로에 있다는 것이다. 길이 '동굴'인지 '터널'인지 있다면 답은 간단하다. 

1. '동굴'이라면 되돌아 나가야 한다. 만약 동굴로 들어온 이유가 외부의 괴물의 위협이라고 한다면 동굴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철저히 계산하고 괴물이 되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탈출하는 것도 방법일 터이다. 만약 괴물이 입구를 막고 있다면 맞서서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 굳이 동굴로 도망쳐왔을 리는 없다. 괴물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괴물의 동굴에서 탈출했다.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우티스' (outis)라고 속인 그는 괴물의 눈을 찔러 멀게 한다. 다른 괴물들이 누가 눈을 찔렀냐고 묻자 키클롭스는 '우티스'라고 외친다. 그리스어로 오티스는 '아무도 아닌 자'라는 뜻으로 영어의 'nobody'이다. 아무도 자신을 찌르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다른 괴물들은 오디세우스를 찾지 않는다. 동굴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정체를 지우는 일이었다. 만약 위기에 처한다면 우리는 '늘 하던 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2. 우리가 있는 통로가 '터널'이라면 문제가 좀 심각하다. 우리가 터널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절반 정도에 왔다고 한다면 지금이 터닝포인트이다. 남은 식량이 딱 절반이라면 나아가봄직 하다. 하지만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또 다른 장애물이다. 여기서부터는 또 다른 도박이다. 절반의 확률로 터널일 것이라고 배팅했다 치더라도 통과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반반 혹은 훨씬 낮은 확률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되돌아가는 것은 어떠한가? 앞의 1의 경우와 같은 낮은 생존 확률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이 상황이 되면 생존자들 간의 토론이 벌어질 법하다. 돌아가야 한다는 파 (회귀파)와 나아가야 한다는 (항해파) 그리고 남은 시간을 안전하게 잘 보내야 한다는 파 (정주파).


영화에서는 중반쯤 지난 시점부터 부상자들이 모두 사망한다. 그들이 책임져야 할 도덕적 의무가 다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창작하는 자'로서 이전에 없던 길을 나아가야 한다.

창작을 하는 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 그리고 우연을 구제하는 자로서 나 저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을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구제하도록 가르쳤다.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지난날을 구제하고, 의지가 마침내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노라! 또 앞으로도 그러기를 원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까지 일체의 "그랬었다"를 전환하도록 말이다.

니체의 우연은 필연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축복이다. "그랬었다"의 태도로 우리는 곤궁을 전환시킬 수 없다. 물론 "그랬었다"의 태도는 한때 그들의 지혜였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고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은 또 다른 곤궁을 자처하는 꼴이다. 독일어의 'notwendig'는 '필연적인'이라는 뜻이다. 니체는 이 말을 분리하여 'not' + 'wendig'로 사용한다. 'Not'는 곤궁, 고난, 역경이라는 뜻이 있고, 'wendig'는 '탄력 있는, 전환의'의 뜻을 가진다. 결국 니체는 '필연'이라는 단어를 조각내어 우리가 스스로를 '곤궁에서 전환하기'를 바란다. 그 방법은 '일체의 그랬었다'를 부정하는 것부터이다.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 3부에서는 희귀퐈, 항해파 그리고 정주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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