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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r 22. 2024

<희망>은 재앙이다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 대한 니체적 해석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1972년 10월 13일 우루과이 공군기 571편이 탑승자 45명 (승객 40명, 승무원 5명)을 안데스 산맥에 충돌해 추락한 후 벌어지는 생존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는 극적 연출이나 감정적 동요를 하기 위한 장치들을 최소한으로 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재난에 처한 생존자들은 72일 만에 구조되었고 45인 중 16명이 생존했다. 이는 '안데스의 기적'이라고도 불린다. '기적'이라 불릴만한 이 사건에서 '희망'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상황파악 - '내던져진 존재'

그들이 탄 비행기의 기체는 산등성이가 부딪혀 두 동강이 난다. 동체의 앞부분은 비탈면을 따라 활강해 상당수의 탑승자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선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비행기와 떨어진 곳 눈 속에 묻어주고 부상자들을 처치했다. 급작스레 닥친 재난에 당황하던 그들에게는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과 여유가 필요했고,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면 구조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당장의 공포를 극복했다.


그들의 구조에 대한 확신은 지나는 시간만큼 '희망'으로 바뀌었고, 라디오 수신을 할 수 있게 된 후 그 '희망'은  절망이 되고 말았다. 자신들에 대한 구조활동을 종료한다는 소식은 그들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했다. 신에게 기도하던 이들의 '희망'은 '기적'이 현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일종의 다짐이었고 구조 종료는 이 세상에 신이 부재하거나, 그들이 신으로부터 외면당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실존적 고민은 생존을 위한 첫걸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희망'은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


'희망'은 재앙이다

희망은 실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서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말하는 '희망'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황당한 말을 한 걸까?

<판도라>,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96

우리에게 '판도라의 상자'로 유명한 이 희망의 상자는 사실 항아리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에피메테우스>, 줄리오 보나소네, 1531-76

위의 그림에서 에피메테우스가 열어보는 것은 우리가 늘 보아오던 상자의 형태가 아니라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의 입구에 쓰여있는 글귀 <spes>는 라틴어로 '희망'이라는 뜻이다. 항아리에서 나오고 있는 인물은 '희망'의 의인화된 모습이다. 라틴어의 'spes'와 그리스어의 'elpis'는 모두 희망을 뜻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희망'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그들이 사용하는 '희망'은 '좋음'이라는 쪽에 있지 않고 보다 중립적으로 사용된다. 미래에 대한 긍정인 혹은 부정적인 '기대'를 의미한다. 여기서 기대는 다가올 것에 대한 기다림이며 그것에 '좋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변하게 된 계기일지도 모른다.
종교성에 강해질수록 이 '바람'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기도'가 되고 기도에 대한 답변으로
'기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된다.


다시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그들은 그들이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언제일지 모르지만 구조될 시간까지 버티기를 시도한다. 이 버티기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허비한 시간으로 변한다. 니체가 비판하는 '희망'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서 발생한 수동적 기대이다.
니체의 '위버멘쉬' (Übermensch)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자이다. 거친 바다를 향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혼돈과 공포의 대상인 바다로 나서는 것은 영웅 여정의 첫걸음이다. 니체는 이렇게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서는 자, '시도와 물음'을 하는 이를 칭송한다. 제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니체에게는 수동적 의지, 중력의 정령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들의 72일간의 고통은 어쩌면 열흘 만에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에게 '희망'은 열흘의 고통을 72일로 연장된 고통을 유발한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니체는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왜 '희망'을 가졌을까?

우리의 의문은 그들은 왜 처음부터 길을 찾아 나서지 않았냐는 것이다. 조금이라고 건강할 때, 조금이라도 생존자가 많을 때 나섰다면 더 많은 생존자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러한 if는 별로 의미가 없다. 어쩌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았을 거라는 '평행우주'가 있을지 누가 아는가? 문제는 우리가 그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안다면 당장 나서거나, 가만히 기다리면 될 일이다.


'희망'은 막연한 기대를 '확신'으로 가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구조될 경우와 되지 않을 경우의 50대 50의 확률. 거기에 나섰을 때 또 다른 조난으로 이어질 경우와 길을 찾을 경우의 50대 50. 결과적으로 생존 확률은 머물 경우에는 50, 나서서 길을 찾을 확률은 25로 줄어드는 이상한 계산이 발생한다. 결국 자신이 머물러 있는 것이 낫다는 자기 설득을 위한 공식이 완성된 것이다. 그들의 '희망'은 아주 합리적이다. 우리는 수많은 공포영화에서 분열의 결과로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을 배웠다. 합심하여 버텼다면? 함께 나갔다면? 이러한 분열에 대한 공포는 상황에 대한 타개가 아닌 심리적 안정감 이상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굳이’ 나서야 하는가?

확실한 보증도 없이 최소한의 안전가옥을 벗어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일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확실성’이다. 정확한 숫자를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엄밀한 분석과 합리적 판단을 원한다. 하지만 이 확실성을 계산하는 사이에 이미 골든타임은 줄어들고 있다. 공포영화에서 먼저 나선 놈들은 거의 예외 없이 희생자로
스러져간다. 그렇다면 나 역시 희생자가 될 순 없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은 공동체 전체를 정지시키고, 모험을 무모함으로, 용기를 만용으로 평가절하하며, 주저함을 신중함으로 고집을 굳은 심지라고 과대포장한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일 뿐이기에 이를 꿰뚫어 본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이야기한다. 한 개인의 무모한 모험의 감행은 공동체에서 조롱거리로 취급될 때가 많다. 행여 높은 가치로 평가받더라도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들이 그와 같은 시도를 감행하는 것에는 주저한다. 남들과는 다르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안전한 방법을 찾고자 하는 이율배반성이 '신중함'이며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정체이다. 물론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무모한 도전에 나선다면 공동체를 운영할 동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전하는 자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도전하고자 하는 자들을 지원하는 풍토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일이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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