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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pr 05. 2024

난파선과 구경꾼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영화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우는 배의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바다로 뛰어들고 몇몇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자리를 지키던 사람 가운데 몇몇은 두려움에 덜덜 떨었고, 몇몇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었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마지막까지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들이다. 재난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예술에 대한 의지를 놓치지 않았고 그들에게 예술은 생존의 문제 그 이상이었다.


난파선

재난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주제는 난파선이다. 배가 좌초되어 망망대해에 스스로 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 재난이 발생하자 사람들에게 '생존의 의지'가 발현되어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따라 뛴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안전지대가 있다는 일종의 확신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왜 난파선에 탑승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굉장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리고 곧장 이러한 반문을 이끌어낼 것이다. "난파될 줄 알고 탄 사람이 어디에 있소!" 하지만 바에 탑승하는 결정을 하는 순간 난파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고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 추락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오디세우스와 시레네, 존-윌리엄 워터하우스 1891

- 그리스인들에게 바다라는 공간은 카오스의 공간, 공포의 공간이었다. 그들에게는 모험이라는 말은 바다로 나서는 것, 재난으로의 향함이었다. 그리스인들의 영웅은 모험을, 항해를, 카오스의 바다로 나서는 것이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험한 바다로 내몬다. 수년간의 난파와 조난으로 이끈다. 이 영웅은 여신과의 안락하고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다시금 바다로 뛰어든다. 오디세우스가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취때문만은 아니다. 그리스 영웅의 진정한 면모는 끊임없는 '시도와 물음'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는 오디세우스와 시레네의 조우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점을 찾아냈다. 욕망을 상징하는 시레네를 만난 오디세우스와 그의 선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욕망을 극복한다. 선원들은 애써 귀를 막고 욕망을 못 들은 척한다. 어차피 들어봤자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돛대에 묶어 시레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행동할 수 없다. 욕망에 대해 자본주의는 한쪽에는 능력과 무능력의 잣대로 다른 한쪽에는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도덕적 굴레로 우리를 구속한다. 어느 것이든 이 유혹에 빠지는 순간 눈앞의 재난은 몸의 재난으로 드러나게 된다. -

우리는 이러한 재난의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재난의 가능성에 배제한 '시도와 물음'은 없다. 다만 우리는 습관적 행위의 반복 속에 '시도'라는 것이 항상 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고 그로 인해 '물음'은 메말라 버렸다. 니체는 이러한 습관적 사고와 행위를 '중력의 정령'이라고 비유한다. 중력이 우리를 끌어당겨 움직이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사고를 늘 하던 대로의 방식, 즉 '그랬었다'의 습관적 사고를 '당연'과 '자연스러움'으로 만들어버리는 '부동의 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새로운 항해는 부정당하고 좁디좁은 땅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환상을 주며 그들은 단지 '기다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일갈한다.

허구한 날 기다려야만 하는 자들도 나, 복도 없다고 말한다. 저들도 내 취향에 거슬린다. 세리, 소상인, 왕, 그 밖의 땅이나 지키고 가게나 지키는 모든 자들 말이다. 

니체가 말하는 '허구한 날 기다려야만 하는 자들'은 '희망'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1부에서 말했듯 희망은 절망을 연장시킬 뿐이다. 희망을 '기다리는 자'는 어느 미래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며 그들의 수동적 기다림은 자신의 처지를 바꿔줄 노예의 정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가 기다리는 것은 그와는 다른 것이다. 달라진 자신의 처지가 아닌 자기 자신이다.

진정, 나 또한 기다리는 것을 배우기는 했다. 그것도 바탕에서부터. 그러나 단지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도약하는 법, 기어오르는 법과 춤추는 법을 배웠다.

니체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라 칭한 것은 스스로에게 열려있는 자세이다. 자신이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단지 배움을 통해 달라질 자신을 환영하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이 바라본 스스로의 한계가 아니라 지금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잉태한 미래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온전한 자기애이며 그것은 우연의 필연에 대한 승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방법은 '시도와 물음' 뿐이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그리고 진정, 그 같은 물음에 대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내 취향이렷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숨기지 않는 나의 취향 말이다.

니체의 시도와 물음은 난파당한 이들이 처한 상황에서 단 하나의 희망만을 갖는 절박함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우리의 인식은 하나의 답이라 여긴 것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에 어긋나거나 그것을 부정하려는 의견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 그의 합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답이라 여긴' 가정이 어긋나는 순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굴과 터널'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 있게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 나선다. 그의 확신이 강할수록 많은 이들이 그를 따른다. 그의 확신은 단지 하나의 '취향'뿐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이러한 '확신적 사고'를 '취향'으로 치부한다. 사실 인정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니체는 보다 다양한 시도와 물음을 환영한다. 정답을 알 수 없을 때 혹은 정답이 없을 경우 우리의 태도는 보다 많은 '시도와 물음'을 통해 선택지를 넓히는 것이 진정한 합리성이다. 니체는 이것을 항해에 비유한다. 보다 많은 난파는 부정을 통한 올바름으로의 향함을 증명한다. '정답 없음'과 '정답을 아무도 모름'은 같은 말일 수 있다. 이 둘은 동시에 '신만이 알고 있다'와 같은 표현이다.

이것이 이제는 나의 길이다. 너희의 길은 어디 있지? 나는 내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꾸해 왔다.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으니!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 中, 프리드리히 니체 -

사실 우리 모두는 난파를 경험한 적이 있다. 어떤 실패도 경험하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난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일반적으로 당연한 것을 필연이라 한다. 죽음 역시 필연인 것은 어떤 인간도 그것을 피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필연적 난파'에서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구조'할 것인가?


구경꾼

독일의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 (Hans Blumenberg)는 <난파선과 구경꾼> (Schiffbruch mit Zuschauer)이라는 책에서 '구경꾼이 있는 난파'라는 비유를 이야기한다. 만약 거대한 배가 기울고 있다면 먼저 가라앉은 쪽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반대쪽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배는 곧 가라앉겠지만 한쪽이 가라앉을 때 반대쪽은 더욱 위기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위기가 오지 않을 것' 혹은 '위기는 아직 너무 먼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자들은 그들의 근거를 댈 것이다. 그것을 이론화하여 위기가 오지 않을 수많은 합리성을 우리에게 던질 것이다. 심지어 진정한 구경꾼은 바다 저편의 땅에서 이들의 위기를 조망한다. 그리스어로 이론 theoria는 구경꾼 theoros에서 유래한다. 이론적 조망이 난파자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그들이 생명을 잃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재앙적 희망'? 그것이 아니라면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신화적 망상'?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의 '희생'이 '세상의 구원'일지도 모른다는 공리주의적 위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학자들에 대하여"편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그러나 저들 학자들은 시원한 그늘 아래 시원하게 앉아 있다. 저들은 무슨 일에서나 다만 관망자(Zuschauer, 구경꾼)로 남기를 원하며, 태양이 작열하는 계단에는 앉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다.

"학자들에 대하여"의 첫머리에는 양 한 마리가 등장한다. 이 양은 이야기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학자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 스스로도 말한다. "그러나 양들에게는 나 더 이상 학자가 아니다. 나의 운명이 그러기를 원하니, 내 운명에 축복이 있기를!" 여기서 말하는 학자는 이전의 지식을 습득하고 반복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대해 새로운 '시도와 물음'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전문분야에 갇혀서 인정할 수 있는 부분만큼만 인정하고 조금의 어긋남이 있을 경우 그것을 부정한다. 그들의 전문성은 사물의 전체성을 관조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니체는 이것을 '절름발이 지식'이라 한다.

구경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포함된 전체성을 관조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즉자적' (an-sich-sein) 사고의 위험성은 관계성을 상실한다. 쉽게 말하자면 스스로를 예외적 존재라고 믿은 유아적 사고, 어찌 보면 '슈퍼맨 증후군'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죽지 않는 존재라는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흔한 '구경꾼적 속성'은 환경문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0년 후의 지구는 지금과 다를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오늘로 위안받고, 내일도 그럴 것이라 안심한다. 이러한 무책임함은 내가 이 지구의 한 부분임을 망각하는데서 비롯된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이상기후 현상의 지역들을 '구경'하며 연민하고 매달 몇 만 원의 후원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이 구경꾼의 미덕이다.


회귀파, 정주파 그리고 항해파

다시 "동굴과 터널"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항해를 포기하고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려는 이들 (회귀파)과 그곳에 머물려는 자들 (정주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들 (항해파)이 있다. 이들은 모두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이 가운데 '정주파'는 위에서 말한 학자들과 같이 나서지도 않으며 '희망'이라는 재앙을 기다리는 가장 수동적인 부류이다. 이들은 재난의 장소에 머물며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것을 일종의 '시험'으로 여긴다. 니체의 분류법으로 나누자면 이들은 '낙타'의 단계에 속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들이닥친 고통의 원인만 묻는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정도의 수준이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말은 "신은 죽었다!"이다. 니체는 이 말을 통해 신을 기반으로 한 도덕체계의 붕괴를 지적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 불행, 기쁨, 행복을 '신의 의지'로 돌리지 않으려는 실존적 태도를 이야기한다. 

'회귀파'들은 일단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찾아 나설 용기를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할 의지도 있고 다가오는 시련에 맞설 용기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목표에 끊임없이 좌절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할 줄은 모른다.

<시지프스>, 티치아노 1549

현명한 인간 시지프스는 그의 영리함으로 신들조차 속였다. 수많은 올림포스의 신들은 한 인간의 교활함에 속아 넘어갔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죽음마저 저 먼 미래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필연은 그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가진 sophos (지혜)는 단지 불행과 죽음을 어느 먼 미래로 미룰 수는 있었으나 극복할 수는 없었다. '정주파'의 일원이라면 낙타와 같이 이러한 신의 형벌에 투덜거리며 돌을 밀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돌이 정상에 도달하자마자 또다시 밀어 올릴 돌을 생각하며 좌절할 것이다. 그에게 구원은 요원한 일이며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신의 선택' 이외에는 없다. '회귀파'의 일원이라면 돌을 밀어 올리기를 거부해보기도 할 것이며 정상에서 떨어뜨리지 않아 보려 노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는 그의 의지를 좀먹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 의지를 유지할 요소가 빠져있다. 그것은 '웃음'과 '사랑'이다.

'항해파'의 일원은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단계에 속한다. 이들의 항해에는 목적지가 없다.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항해가 끝이 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육지는 목적지가 아니라 정거장이다. 항해자들에게는 바다가 디폴트 값이고 육지가 station이다. '항해파'들은 돌을 밀어 올리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돌을 밀어 올리면 더 재미있을까?", "이번에는 이렇게 해볼까?" 등등의 '시도와 물음'을 행한다. 그들은 '유희하는 자' (homo ludens)이다. 그들에게는 '웃음'이 있으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 있다. 이것이 'amor fati' (아모르파티)이다.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amor fati 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그러나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총명한가' 中, 프리드리히 니체 -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감정에 대해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ck)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말한다. 단 하나 그것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숭고함'이라고 한다. 니체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속이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속이는 것을 경멸한다.


생존자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들을 죽음의 위기로 내몬 것은 '희망'이라는 재앙이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것, 즉 '항해'를 포기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인정했고 나설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였다. 하나로 똘똘 뭉치는 공멸의 길을 포기하고 둘을 내보냈다. 죽음의 길로 나선 그들에게는 생명이 쫓아왔다. 길을 나선 두 명의 항해자들은 재난으로 뛰어든 자들이다. 

저들은 아직도 나의 재난들과 우발적인 재해들을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우발적인 재해로 하여금 내게 다가오도록 하라. 우발적인 재해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순진무구하니!" 내가 재난과 겨울의 곤궁함, 그리고 북극곰의 모자와 눈 내리는 하늘 외투로 나의 행복을 둘러싸지 않았다면 어찌 저들은 내가 누리는 행복을 감내할 수 있으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감란산에서"中, 프리드리히 니체 -

니체는 행복을 좇을 때 행복에 다다를 수 없고, 시도와 물음을 행할 때 행복이 쫓아온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을 구한 것은 그들 스스로이다. 

난파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난파당해도] 자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철학자라는 것이다.

- <난파선과 구경꾼>, "난파자들에게 남겨진 것"中, 한스 블루멘베르크 -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교훈'따위를 주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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