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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19. 2024

카프카의 <변신> #5

완전한 통제와 자발적 복종

니체는 <도덕의 계보>와 <선악의 저편>에서 선과 악, 도덕이 생겨난 이유에 대해 논한다. 니체는 선과 악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평가기준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절대적 선의 기준인 '신'을 상정함으로써 상대적 기준을 절대적 기준으로 고정시켰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선'은 '누군가를 위한 덕'이 되고 '악'은 '누군가를 해하는 덕'이 된다. 여기서 '누군가'는 동일한 계급으로 지배층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배층, 즉 도덕에 의해 지켜지고 보호받으며 이익을 얻는 이들의 도덕을 '주인의 도덕'이라 부르고, 지배층의 보호를 위해 봉사하고 복종하는 이들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 부른다. 결국 선과 악은 주인이 노예를 부리기 위한 도덕을 내면화하기 위한 기준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계약관계가 등장하는데 노예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해 주기 위해 가상의 보상제도가 그것이다. 종교에서는 이것은 현세의 희생과 믿음이 내세의 영생을 보장해 주는 계약관계로 드러난다면, 자본주의에서의 계약관계는 임금과 고용안정이라는 보상이 그들의 복종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다.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계획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증명된 방식, 그것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이다.


룸펜프롤레타리아(Lumpenproletariat)

그레고르가 출근 기차에 타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지배인이 직접 그레고르의 집으로 왔다.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각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한두 시간의 지각상태를 회사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레고르만 아주 작은 실수에도 엄청난 의혹을 제기하는 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는가? 도대체가 모든 직원들이 예외라고는 없이 룸펜들이란 말인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中)


여기서 룸펜(Lumpen)이란 독일어로 쓰레기, 넝마라는 뜻이다. 연결하자면 쓰레기-노동자계층을 뜻하는 것인데 회사가 직원들을 모두 쓰레기-노동자 취급을 한다는 말이다. 우리말에는 이 단어가 녹아있는데 일하지 않는 '잉여인간'이라는 의미로 쓰는 '놈팡이'가 그것이다. 왜 회사는 직원들을 쓸모없는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것일까? 그들이 작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직원의 작은 실수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손실을 의미한다. 시간적 손실이든 인적 손실이든 모든 것은 수치로 환산되어 자본 손실로 측정된다. 전체에게 손실을 주는 것을 '악'이라 한다. '악'은 제거의 대상이다. 회사는 '손실의 주체'를 박멸하고자 한다. 완전한 통제만이 손실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룸펜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비정상적 일용직 노동에 관여하는 최하층 노동자를 비판하는 멸칭 용어이다. 이 계층은 노동자에 속하지만 자본주의의 궁극적 도달점인 공산사회로의 이행을 방해하는 세력이다. 공산사회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혁명이 필요한데 이들은 이 혁명을 방해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구체제에서 수동적인 자본주의 부패분자들은 때때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참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금전적 욕구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방해하고, 반혁명 음모에 매수될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中)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기반으로 판단할 때 자본주의에서 생산성이 0 혹은 그 이하인 부류는 '가치'가 없는 존재이다. 근대의 합리성은 이토록 차갑고 냉정하다. 그레고르의 성실한 직업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실수'는 회사가 주입한 '통제'가 내면화되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시간에 집착하며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된다는 그레고르의 히스테릭한 반응은 스스로의 '가치상실'을 의심하는 심리적 반응이다. 그것이 맞다면 그는 룸펜이 되고 만다. 이 회사에 그를 위한 공간은 없다. 


완전한 통제를 통해 룸펜으로 변질될 직원들을 구해내는 것은 노동자들을 구원하는 행위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게으르고 굶어 죽을 것이냐? 회사에 충성하고 생존할 것이냐? 이 선택의 기로에서 노동자들은 자발적 복종을 선택한다. 사실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다. 마르크스는 선택지를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혁명적 움직임을 필수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발적 복종상태는 와해시키는 것이 매우 힘들다. 노동자는 자신의 가치를 실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실적은 다른 노동자와의 비교를 통해 평가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서로 경쟁관계가 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상태가 된다. 자신의 '생산가치'가 낮은 노동자일수록 감시의 역할 혹은 노동자 사이의 분열을 일으킨다. 이 행위가 자본가들의 환심을 살 수 있고 회사 전체를 위기로 빠뜨리는 혁명을 막는 혁혁한 공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룸펜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방해하는 세력이라 한 것이다.


소설 속의 룸펜은?

<변신>에 등장하는 진짜 룸펜은 누구일까?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것은 회사의 입장에서 룸펜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 가치를 상실한 그는 가족 안에서도 룸펜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레고르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벌레로 변한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불안만 있을 뿐이다. 그는 아직 그가 룸펜이 되었음을 들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진짜 룸펜은 그레고르의 가족들이다. 그의 가족들이 지배인에게 그레고르를 대신하여 변명을 대는 것은 그들의 금전적 욕구를 채워주는 유일한 존재가 그레고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그레고르의 룸펜화를 막아내는 역할도 한다. 만약 그레고르가 일을 관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 한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의 혁명적 선택을 막아내는 회사의, 자본가의 대변인이 되지 않았을까?


지배인 역시 자본가의 편에 서 있지만 관리직을 맞고 있는 이 사람 역시 피고용인에 불과하다. 


<"안에 뭔가가 떨어졌어요"라고 왼쪽 옆방에 있는 지배인이 말했다. 그레고르는 언젠가 지배인에게도 오늘 자신에게 일어난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럴 가능성은 있다.>


지배인 역시 그레고르와 같이 룸펜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 역시 고용주의 평가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룸펜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을 도구로 바라본다는 의미이고 쓸모에 따라 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과 가짜 해결책

고용불안, 사회 속에서의 생존위기는 스스로의 힘으로만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이 불안을 극복하는 가짜 해결책은 또 다른 걱정으로 걱정을 잊는 것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유럽에서 가장 큰 문제는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질병이었다. 도시는 이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산업은 그들을 이미 수용했다. 노동자들은 위생 문제로 각종 질병을 앓고 있거나 질병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은 언제 병들지 알 수 없으며 언제 그들의 가치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고 살아야만 했다. 질병에 걸린 노동자는 건강한 노동자로 교체 가능했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에 기업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기업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경우 베를린 슈판다우(Spandau in Berlin)에 위치한 지멘스슈타트(Siemensstadt)이다. 1899년부터 노동자를 위한 '집단 주택(Wohnkolonie)'를 계획하여 1914년에는 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23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후 1953년까지 지속적인 확장으로 1950년에는 12,819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집합단지를 구성했다.

1931년 지멘스슈타트(Siemensstadt), 슈판다우, 베를린

제대로 된 노동 및 주거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시기에 노동자들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다른 염려로 덮었다.


"... 우리 같은 장사꾼들은 유감스럽게 여기든 운이 좋다고 여기든, 몸이 조금 좋지 않은 것쯤은 종종 일에 대한 염려로 금방 극복해야만 합니다."


지배인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즉 질병 상태를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식으로 해결하라 종용한다. '유감스럽게 여기든 운이 좋다고 여기든'이라는 말은 몸이 '조금' 좋지 않은 것을 '아직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불안은 현실이 되므로 '조금' 아픈, 즉 '아직 일할 수 있는' 상태는 극복 가능한 상태가 된다. 극복의 방법은 더 불행한 상황에 대한 가정 '가치상실'이다.


지배인이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뭔가가 떨어졌다" (da drin ist etwas gefallen)이라고 말한 것은 '누군가가 떨어졌다'와 반대의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레고르가 벌레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이미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것은 '그'를 '그것'으로 부르는데서 이미 확실해졌다. 많은 노동자들은 병을 치유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불확실한 미래보다 더욱 확실한 미래를 쫓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참고 인내하며 희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덕목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니체의 말처럼 이 '좋은' 것은 그들을 위한 '좋음'이 아니다.


다음 주에 이어지는 내용은 '이성적'이라는 것의 편협함과 자기 중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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