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mo ludens May 26. 2024

카프카의 <변신> #6

이성과 합리의 감옥

근대는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다. 합리주의는 이성을 통해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새로운 미래로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19세기말 20세 기초라는 근대의 입구에서 근대 이후의 정신,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는 니체였고, 프란츠 카프카 역시 이성과 합리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성과 도덕

소설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는 그레고르의 변신은 그의 합리성과 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레고르의 사회적 가치는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경제활동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변신 후 그는 더 이상 이성의 상징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타인과 대화하지 못한다. 그는 목소리를 잃었으며 그것은 사회 내에서의 지위상실을 의미한다. 그가 바라던 일상으로의 복귀는 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우리에게 경제적, 사회적 자유를 보장할까?


 <울고 설득하면서 그를 방해하는 대신에 지금은 조용히 내버려 두는 것이 훨씬 더 이성적일 듯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어중간한 모습이 다른 이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방 안의 상황을 알고자 그레고르의 집을 방문한 지배인에게 감정적 호소나 변명을 하는 것은 상황을 해결하는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떠한 행동으로 인해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 그 행동은 '할만한' 일이 아니다. '이성적'인 것은 상황을 더 나쁘게 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레고르는 합리적 선택을 한다. 그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합리적 판단이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한 개인의 합리적 판단이 공동체 전체의 합리적 판단과 충돌을 일으킨다. 그의 행위가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레고르를 향한 그들의 압박과 비난을 정당화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점은 이성과 합리성은 그것을 내세우는 쪽의 판단을 정당화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그럴듯한 이유와 변명이 '합리적'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합리적' 비판을 간단히 방어할 수 있다. 


<놀랍군요놀라워당신이 조용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상하고 변덕스러운 기질이 있었네요.>


상대적으로 우위의 지위를 가진 지배인은 그레고르를 '이성적인 사람'에서 '이상하고 변덕스러운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비난한다. 그에게 '이성적인'의 의미는 '정상적이고 변덕이 없는', '순종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지배의 논리이며 니체는 이것을 '노예의 도덕'이라 했다. 공동체에서 '선'이라 불리는 것은 지배층을 위한 '선'이며 피지배층은 이러한 도덕을 내면화하여 적극적으로 따르고자 한다. 반대로 '주인의 도덕'은 '이상하고 변덕스러운 기질'을 지닌다. 주인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도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비언어적 존재

<한마디라도 이해하셨나요그가 우리를 놀리는 건 아니죠?” … 당장 의사 선생님께 갔다 오너라그레고르가 아프단다빨리 의사를 불러오너라. 지금 그레고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니?” “그건 동물의 소리였어요”라고 지배인은 어머니가 소리 지르는 맞은편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레고르는 이제 완전히 언어를 상실하고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졌다. 이제 그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언어적 존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신 혹은 동물. 이 둘은 폴리스에 속할 수 없었다. 폴리스의 방향을 정하는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목소리는 라틴어로 vox이며 이것이 투표를 뜻하는 vote와 같은 어원 votum을 가진다. '맹세하다'라는 뜻의 votum 은 신앞에서 혹은 민중 앞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고 이것은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이 비언어적인 이유는 언어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신은 그의 의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인간에게 소통을 위한 전달로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동물은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존재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인간의 부분, 즉 본능과 욕망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이 둘은 '자연과의 연관성, 인간의 본성, 욕망, 힘'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의 두 그림에서 신 중의 신 제우스는 독수리와 소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두 이야기 모두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is)>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카프카의 <변신(Verwandlung)>의 제목을 차용한 원전에 수록된 이야기이다. 카프카는 신과 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비언어적 메시지에 착안하여 인간이 벌레로 바뀌면서 생기는 격의 차이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힘'으로 인해 생긴 듯한데 그것이 '변신'의 이유라 여겨진다.


<이제 그도 문가에 서 있는 지배인을 보았는데 그는 벌린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보이지 않는 어떤 힘 (eine unsichtbaregleichmäßig fortwirkende Kraft)이 그를 내모는 것 같았다.>


이러한 힘은 사건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인간의 답답함에 대한 잠정적 해답이다.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낙관론으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이야기한다. 거대한 자본의 흐름과 방향을 알 수는 없으나 시장 경제가 적당한 가격을 형성할 것이라는 설명하지 못할 근거를 '모르겠다'로 결론 내린 것이다. 하지만 '모르겠다'는 세련된 말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이 되었고 그것은 나만이 아닌 모두에게 보이지 않음으로써 들통나지 않는 거짓이 되었다.


원인 모를 불행

인간에게 들이닥친 불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분명하고 정확한 원인이 있는 것 같은 이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누가 줄 수 있을 것인가. 원인은 늘 불명이다. 근대인에게 불행의 원인은 인식의 영역 밖에 있다. 중세인들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심판은 신에게서 찾았다. 인간의 죽음은 원죄라는 원인에 있고 삶에서의 선과 악, 믿음에 대한 결과는 사후의 세계를 결정하게 된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구조적 해답을 명확히 해 둔 덕에 그들에게 불안함은 신앙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인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은 사실상 개인적 차원의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빈곤과 질병이라는 불행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다'에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의 차이도 크다. 하지만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OECD 상위권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과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의 행복의 척도는 기본적인 범주부터 현저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삼시 세끼를 먹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오늘은 뭘 먹을까?'라는 질문은 같은 위계에 있지 않다.

좌: <십자가에 못박힘>, 페터 파울 루벤스, 1620; 우: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 1893

뭉크의 그림에서 중심의 인물이 절규하는 이유는 그림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그림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감정이 투영된 주변 환경들 뿐이다. 인물의 표정이나 배경이 사실적 묘사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뭉크가 저 시기에 영양실조와 탈모를 겪어서 실제로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면 나름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 있으나 딱 거기까지다. 반면 루벤스의 그림에서 예수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마리아와 일행들의 감정의 원인은 분명하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의 육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신(incarnation)의 숭고한 희생정신이라는 명확한 고통의 이유가 고스란히 그림에 드러나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가장 큰 불행, 즉 죽음의 이유를 이성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원죄'라고 하는 가정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것이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의 합리성을 해치지는 않는다. 원죄와 그것으로 인해 받은 현실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죄, 그리고 그것을 대속하기 위해 강림한 예수와 이후 삶의 재평가로 인한 내세의 판결은 꽤나 합리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의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은 현재의 불안을 경감시켜 주는 꽤나 잘 듣는 약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과 합리를 포함한 설명한 우리를 도덕이라는 감옥에 가두는 결과를 낳았다. '신의 의지'는 '선의지'로 내면화되고 그것을 따르지 않을 경우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공동체의 선'을 선택할 자유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이성의 감옥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공간들에 드러나는 폭력성을 지적한다. 병원, 군대, 감옥, 학교 등은 인간을 특정한 목적으로 이끄는 '규율권력(pouvoir disciplinaire)'이 외면화된 공간이다. 이 공간의 특징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이며 단조롭다. 동형질(homogenous)의 공간성은 같은 환경을 주어 사람들이 같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등한 조건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다른 쪽 거리에는 마주하고 서 있는 끝없는 회색과 검은색 집들의 단면이  명확하게 보였다. – 그것은 병원이었다. – 전방으로 튀어나온 단단하고 규칙적인 창문이 있는 곳이었다. … 맞은편 벽에는 군대 시절 그레고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레고르의 비밀이 폭로되고 타자성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이성의 감옥이었다. 그에게 명확해진 것은 타자가 되기 전에는 편안하기만 했던 방과 창의 풍경이 단조롭고 흑백의 명확한 구분이 있는 단단한 규율의 세계였다. 사진 속의 그는 이러한 규율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변신'한 그에게 '이성'은 더 이상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이전 05화 카프카의 <변신>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