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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02. 2024

카프카의 <변신> #7

변신완료 - 타자화

줄거리

그레고르가 문을 열고 사람들 앞에 드러났을 때 그레고르는 이제 자신이 옷을 입고 정상적인 날을 보낼 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눈앞에 있는 지배인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며 사장 앞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 애원한다. 또한 고용인인 사장 앞에서 자신과 지배인 모두 피고용인이라는 동질감을 강조한다. 이에 지배인과 다른 사람들의 불쾌한 반응이 나오며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을 완전히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특히 아버지의 강압에 다시 방 안으로 내몰리게 된다.


자기 인식의 부재 상태와 무관심

그레고르는 자신의 업무인 영업직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레고르의 일은 1년 내내 외근이기에 "쉽게 험담이나 뜻밖의 사고, 사건 그리고 근거 없는 불평의 희생양"이 되고 "그러한 것들에 완전히 대응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에 대해 출장 간 사람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한 외부적 시선을 알아차릴 기회가 없으니 대응은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그레고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증상뿐이다.


<출장을 마치고 너무 지쳐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자신의 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나쁜 결과가 생겼다는 것만 알 뿐이죠. 지배인님, 적어도 제가 조금이라도 옳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지는 마세요!>


그레고르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에 생긴 "나쁜 결과"이다. 원인은 알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외부의 소문에 대해서도 원인을 알 수 없고 사실 결과도 짐작만 할 뿐 이러한 극단적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는 알아차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레고르는 자신 스스로의 몸에 일어난 일에 대한 진단도, 자신을 둘러싼 외부에서 벌어지는 자신에 대한 진단도 정확히 내리지 못한다. 진단이란 증상을 통한 원인의 파악인데 그레고르는 결과만 알 뿐 원인에 대한 파악은 불가능하다. 그레고르는 왜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코와 나르키소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903

그림 속에 두 인물이 등장한다. 왼편의 여성은 에코이고 오른쪽은 나르키소스이다. 에코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님프였는데 헤라에게 입을 잘못 놀린 죄로 자신의 말을 빼앗기고 남의 말의 꼬리만 반복하는 벌을 받았다. 나르키소스는 어릴 적부터 빼어난 외모로 사람들의 흠모와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자기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자기 인식의 결여이다.


에코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이다. 상대의 말에 호응만 해주는 일종의 '리액션 기계'이다. 물론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에코는 인기 있는 대화(?) 파트너일 것이다. 만약 이런 기계적 리액션 앞에서의 말하기를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에코가 헤라로부터 받은 형벌의 정체는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상실은 공동체 속에서는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누구도 에코를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의견,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르키소스는 신탁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길러졌다. 자신을 모습을 보면 단명한다는 이상한 신탁에 그의 부모는 그를 거울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시켰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호의로 대하고 사랑을 표현하자 그는 그 호의와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을 알지 못해서이다.


이런 자기 인식이 결여된 둘이 만났다. 에코는 한눈에 나르키소스에게 반했으나 다가가 말을 걸 수 없었고 지나가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에코는 그녀에게 누구냐고 물었으나 되돌아오는 답은 똑같이 "누구냐"라는 말 뿐이었다. 동족을 서로를 알아보듯 그녀를 매몰차게 뒤로하고 떠나는 나르키소스에게 그녀는 큰 상처를 입고 만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스스로 동굴로 숨어들어 육신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산에서 육신을 잃고 목소리만 남은 그녀가 에코, 즉 메아리로 우리의 말을 반복할 뿐이다.

<에코>, 알렉상드르 카나벨, 1887

자신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던 그레고르는 왜 사회적, 개인적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그는 스스로의 가치를 타인의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자신을 사회적 쓸모로만 평가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 했다. 또한 사회, 즉 그레고르를 둘러싼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레고르가 주는 쓸모로 그를 판단할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쓸모로 판단하는 상태, 칸트가 말하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비도덕적 판단이다.


쓸모 없어진 그레고르에 대해 지배인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지배인은 그레고르가 처음 말을 내뱉었을 때 이미 등을 돌리고 어깨를 움찔거리며 공포와 혐오감으로 입술이 위로 치켜진 채 그레고르를 뒤돌아보았다.>


룸펜으로 전락한 그레고르, 사회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레고르는 이제 완전한 '타자'로 인식된다. 타자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은 '공포와 혐오감'이다. 타자가 공동체를 위협할 정도로 강하다면 '공포'로 인식되고 약하다면 '혐오'의 대상으로 꺼려진다. 산업 사회에서 타자는 자신의 자리를 부여받지 못하고 쫓겨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존의 위기에서 그레고르는 지배인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 평가는 일회적이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족은 달랐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레고르가 가게에서 기반을 닦았다고 확신했고, 지금 당장의 걱정으로 미래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레고르의 룸펜들, 즉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상태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눈앞의 문제, 즉 그레고르에게만 운명을 맡기는 기생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숙주의 미래보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숙제의 변신에만 주목한다. 그들의 내부적 평가인 '가게에서 기반'을 닦은 것은 현재 그레고르의 문제만 해결되면 미래는 자연스레 보장된다는 일종의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변신완료 - 수용

그레고르가 지배인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쓰다가 바닥에 엎어진 후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넘어지는 순간 바로 그는 오늘 아침 처음으로 육체적인 쾌감을 느꼈다. 다리들은 딱딱한 바닥을 짚고 있었다. 마치 그가 왜 기뻐하는지 알아챈 것처럼 그에게 완전히 복종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이 완전히 다 낫는 순간이 멀지 않았다고 느끼게 했다.>


그레고르의 다리들이 바닥을 짚었을 때 그는 왜 '육체적인 쾌감'을 느꼈을까? 그는 벌레로 변한 자신의 신체에 맞지 않는 행동양식을 보였다. 다리로 열쇠를 끼워 문을 열려는 시도, 그것이 실패하자 입으로 물어서 문을 열려는 시도, 침대에서 다리가 하늘을 향한 채 누워있던 것들 모두 자신의 변화한 신체와 맞지 않는 행동들이다. 그레고르가 느낀 육체적 쾌감은 되찾은 감각, 사회에 맞춰진 육체가 본성과의 괴리를 보이던 과거와 결별하고 본성과 육체가 합치되는 스스로를 수용하는 단계로 보인다. 드디어 육체는 고통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에게 복종하고, 괴리로 인해 생긴 고통들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근현대인들의 대부분의 질병은 정착생활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을 한다. 노마드(Nomad), 즉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살던 인간이 정착을 하면서부터 행정과 사무직과 같은 책상에서 일하는 것이 보편화되었고 그로 인해 육체가 사회적 용법에 맞도록 변형되어 사용됨으로써 갖은 질병에 취약해진다.


그레고르의 쾌감은 관료적, 산업적 틀에 강제적으로 맞춰진 육체의 해방, 유목민으로의 회귀를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벌레로 변모한 자신의 새로운 육체에 대한 수용이며 동시에 자신을 억압하던 심리적 구속, 즉 가족과 직장에서의 과도한 책임감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도 한다.


해방된 신체를 사용하던 그레고르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에게는 타자의 공간의 필요하다.


<하지만 그레고르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뒷걸음을 칠 때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는 방법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체에는 새로운 삶의 방향이 필요하다.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이제 막 되찾은 그레고르는 이제 자신의 신체와 맺는 주변 환경과 사회와의 또 다른 관계설정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방향성에 그레고르는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다.


타자의 고립

타자를 대하는 공동체의 반응은 어떨까? 과연 우리는 타자를 환대할 수 있을까? 인종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의 사회에서 타자로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반응은 한 사회의 개방성을 측정하는 지진계(seismometer)가 된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사회에서 타자는 늘 환대받지 못했다. 그들을 대하는 대부분의 반응은 그레고르의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 참을 수 없는 쉿 쉿 소리만 없다면! 그레고르는 그 소리에 완전히 당황했다. 쉿쉿 소리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완전히 돌아섰다.>


몫이 없는 자, 사회적 목소리가 없는 자들에게 아버지는 '쉿쉿'소리를 낸다. 고대 그리스에서 야만인을 칭하던 말이 바르바로이(barbaroi)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는 말이 그리스어 아니기에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들이 하는 말을 '바르르바르...'라고 흉내 내는 멸칭이었다. 언어가 없는 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들을 우리는 오랫동안 이성의 바깥에 있는 자들로 여겼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그의 박사논문인 <광기의 역사> (1961)에서 역사적으로 광인들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분석하며 그 반대편에 있는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정불변한 것과 거리가 먼지를 비판한다. 광인을 판별하는 기준인 이성이 흔들린다면 광기는 언제든지 이성일 수 있고, 이성은 언제든지 광기일 수 있다. 그레고르가 미칠 지경에 이르는 것은 아버지의 소리가 그를 광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타자가 된 아들을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나서서 방 안으로 밀치고 그 방의 문을 닫는다.


<그때 구원이라도 하듯 아버지가 뒤에서 그를 세게 밀쳤고 그는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면서 방문에서 멀찍이 밀려나 방 안에 나가떨어졌다. 아버지가 지팡이로 문을 꽝 닫았다. 남은 건 정적뿐이었다.>


아버지가 그레고르를 밀치는 것은 왜 '구원'일 수 있을까? 그레고르가 흘린 '피'는 어떤 의미일까? 아버지가 그레고르를 위한 행동을 했다고 해석을 해본다면 아버지의 행동은 그레고르의 새로운 신체를 자신의 공간으로 위치시켜 주는 일종의 구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가족들을 위해 골칫거리인 그레고르를 격리시키는 가족을 구원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왼편: <원죄와 낙원에서의 추방>, 미켈란젤로, 1509-10; 우측: <십자가에서 내림>, 페터 파울 루벤스, 1612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해 본다면 아버지를 그리스도로 아들을 아담 혹은 예수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죄를 저지른 아담을 이 땅으로 내려보내는데 이것은 벌이기도 한 동시에 그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는 구원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혹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자 자신인 동시에 아들인 예수를 이 세계로 내몰았고 예수는 이 땅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며 고난을 겪는다. 이 고난을 그레고르가 받는 타자로서의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그레고르가 아버지로부터 '사과'를 맞아 등에 박히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남아있는 정적은 이러한 대립된 구도, 타자와 우리의 경계가 지어지고 타자의 고립과 고독의 상태를 의미한다. -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타자의 고립상태를 다루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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