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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09. 2024

카프카의 <변신> #8

모든 가치의 전도

#줄거리

그레고르의 변신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덧없는 희망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가족들의 소망도 이제는 없다. 그의 변신은 거부에서 수용의 단계로 넘어왔다. 방 안에 갇힌 그레고르는 타자로서의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하나하나 겪게 된다. 사회적 역할의 상실은 사회적 시간의 몰락을 의미하고, 취향(taste)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입맛은 이전의 취향의 상실, 즉 의식주의 변화를 극적으로 겪게 된다. 그에게 불안을 주던 요소는 안정감을, 안정감을 주는 요소는 불안을 주게 된다.


모든 가치의 전도

방안에 고립된 그레고르는 은폐되었던 동안 유지해 오던 불편함, 즉 변신 이전의 습관이 주는 신체와 행동의 불합치성이 깨어졌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신체에 맞는 행동을 찾아가고 이것은 그가 살아오며 지켜온 모든 가치가 뒤바뀌는 것(Umwertung aller Werte)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가치의 전도 안에서모든 도덕가치의 시작에서지금까지 금지되고 멸시받고 저주받던 모든 것에 대해 ‘그렇다 ‘라고 말하기믿음을 가지기이 그렇다고 말하는 ‘ 책은 소위 나쁜 것들에 대해 그의 빛그의 사랑 그리고 애정을 발산한다그리고 그들에게 영혼“ , 선한 양심존재할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을 돌려준다도덕성은 공격받지 않고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다… 이 책은 ‘아니라면?’으로 마친다이 책은 아니라면?’으로 끝나는 유일한 책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의 타자화된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떠한 가치들의 전도를 경험하는가?


전환된 시간

<실신한 듯이 곤하게 잠을 자던 그레고르는 해가 질 무렵에 깨어난다. 사실 무언가가 그를 깨우지 않았어도 곧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숙면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레고르를 깨우던 것은 알람시계이다. 사회적 시간, 산업화의 시간은 그레고르의 신체 피로도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하루를 알린다. 자연의 시간인 일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를 깨우던 알람시계는 더 이상 그의 수면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 시간이 그레고르에게는 의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레고르는 그 시간으로부터 의미를 상실했다. 그레고르가 일어난 시간은 그의 신체의 시간, 즉 회복의 시간이다. 그에게 해가 뜨고 지고, 알람 시계가 울리고 기차가 출발하는 자연과 사회의 시간은 저물었다. 실제로 산업화 과정을 겪는 동안 평균 수면 시간은 큰 폭의 감소를 보였다. 영국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은 평균 12시간 이상을 기록했으며 주 70 시간의 엄청난 노동량은 먹고 자는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인공조명 아래에서 늘 낮과 같이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자연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화가 진행된 선진국에서의 수면시간은 늘어난다. 하지만 문화적, 사회적 시간은 점차 밤의 시간을 빼앗는다.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과 유흥가의 인파는 잠들지 못하는 도시인을 만들었고 좀비와 같은 그들에게 신체적 감각은 점점 무뎌져갔다.


빛과 어둠의 전환

<가로등 불빛이 천장 위에서 가구의 높은 부분까지 희미하게 비추었지만 그레고르가 있는 아래는 어두웠다.>


그레고르의 방에 대한 묘사는 전체의 분위기와 작가의 메시지를 읽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레고르의 방을 비추던 태양은 위에서 아래로, 벽면에서 바닥까지 혹은 침대와 소파의 그레고르를 비추었을 터다. 하지만 낮이 지배하던 시간이 끝이 나고 밤이 지배하는 시간에 이 방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뒤집어진 빛의 영역이 된다. 가로등은 그레고르를 숨겨주기 위해 그가 없는 부분을 환히 비춘다. 밤의 빛은 그레고르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레고르는 빛의 존재에서 어둠의 존재로 전환되었다.


선에서 악으로의 전환

<그의 왼쪽 옆구리에는 길게 째져 불쾌하게 당기는 흉터가 생긴 듯한 데다 모든 다리가 절뚝거렸다. … 옆구리 한쪽만 상처가 났다는 것은 거의 기적 같았다.>


<십자가에서 내림>, 페터 파울 루벤스, 1613

인간의 죄를 대속하러 온 신이자 신의 아들인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로마의 병사 롱기누스는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본다. 사실 그가 오른편을 찔렀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예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올바르고 선한 것이기에 그의 올바른 옆구리에 상처가 났다. 올바른은 오른쪽이다. 영어의 right/ 라틴어의 dexter는 올바름, 선을 상징한다. 예수의 상처가 오른쪽 옆구리, 선을 행하는 기적이라면 그레고르의 왼쪽 옆구리의 상처는 선과 악이 전도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의 상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그의 가족에게는 기적일 수 있다.


취향의 전도

그레고르의 변신은 여러 감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의 신체로 느끼던 감각들은 더 이상 그에게 같은 감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연결하는 모든 것은 감각 기관을 통해 전달된 감각, 감각인식뿐이라는 경험주의의 통설은 감각이 유일하게 인간의 내부 세계에 주입되는 외적 정보라는 의미이다. 이 정보 가운데 끌리는 것과 끌리지 않는 것, 때로는 생존에 필요한 이 정보들은 바뀌어버린 신체에 따라 다른 취향으로 드러난다.


<숨을 헐떡이며 온몸을 움직여야만 먹을 수 있었다 – 우유가 전혀 맛이 없었다예전에는 가장 즐겨 마시던 것이었고 분명히 여동생이 들여놨을 텐데도 말이다그는 반항하듯 그릇을 등지고 방의 가운데로 기어 돌아갔다>


그레고르가 즐겨 마시던 우유는 더 이상 그의 취향이 아니다. 이후 여동생은 각기 다른 음식들을 제공하는데 그 가운데 그의 입맛에 맞는 것들은 그가 이전에 먹지 않고 남긴 음식 혹은 썩어서 먹지 못하던 것들이다. 그나마 이전에 먹던 것에 취향이 변하지 않은 것은 치즈다. 치즈는 발효음식으로 썩은 것과 썩지 않은 것의 절묘한 경계에서 탄생한 음식이다. 우유를 가공하여 만들어낸 치즈는 자연 발효상태에서도 생겨나는데 인류는 이 발효를 정확한 공정을 통해 통제하여 다양한 취향을 창조했다. 까망베르, 브리, 크림, 구다, 체다 등의 다양한 치즈는 만드는 공정과 재료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레고르의 감각의 민감성은 둔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예민함으로 이동했다. 칸트의 3대 비판서 가운데 하나인 판단력 비판은 이러한 취향의 판단, 미적 판단에 대해 다룬다. 플라톤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진, 선, 미를 연결된 것으로 생각했다. 진리는 선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진리에 가깝다. 하지만 바뀐 감각은 다른 '미'적 기준을 만들어냈고 더 이상 선하지도 진리에 가깝지도 않다.


편암함과 일상의 전도

<하지만 5년 전부터 그가 지낸 넓고 자유로운 방에서 납작하게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반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리고는 수치스러움을 느끼면서 그는 소파 아래로 기어들어갔다희한하게 등이 약간 물리고 머리를 들 수 없는데도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레고르는 5년 동안이나 편안함을 제공했던 방이 불편해졌다. 넓은 공간의 자유로움은 불안함으로 뒤바뀌었다. 넓고 개방된 방은 그에게 수치심을 부여할 뿐이었고 그는 어둡고 가려진 소파 아래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심지어 그곳은 너무 좁아 등과 머리에 불편함을 주는데도 말이다. 새로운 신체에는 새로운 감각이 부여되고 그것은 그레고르를 숨기 좋고 드러나지 않는 '은폐'의 공간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편안한 일상의 공간이 갑자기 불편한 비일상적 공간으로 느껴졌다.

<몽파르나스역> 조르조 데 키리코, 1914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는 일상적 공간을 비일상적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즐겨했다. 파리에 위치한 몽파르나스역을 그린 이 그림은 평범한 역 주변의 풍경을 그렸지만 다소 이상한 느낌을 준다. 화가는 일정하지 않은 빛의 방향과 왜곡된 투시도법, 다양한 시점을 통해 관찰자가 일상 공간을 어색하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간을 다른 생물의 시선으로 본다면 어떨까? 벌레가 내 방을 관찰하는 시선은? 물고기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느끼는 공간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기관에 맞춰 정해진다. 조금만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지거나 둔한 그것을 가진다면 이곳은 언제나 새롭게 인식될 수 있다.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점차 '그'에서 '그것'으로 불리게 된다. 이것은 다른 감각을 가진 존재, 타자에 대한 이름 붙이기이다. 그의 희망과 생존은 다른 이들에게는 절망이고, 그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는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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