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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16. 2024

카프카의 <변신> #9

운명과 자기희생

줄거리

방에 갇힌 그레고르에게는 새로운 환경의 변화가 필요했다. 거추장스러운 가구들은 그의 움직임을 방해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그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라 관찰자인 가족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그레고르의 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레고르는 바뀌는 방의 환경에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가구가 주는 좋은 영향과 가구의 쓸모없음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가구의 이동 과정에서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것은 점차 그레고르와의 접촉이 있는 유일한 인물인 여동생 그레테이다. 그녀는 이 비상시국의 유일한 중재자이자 몰락하는 오빠의 권력을 대체할 유력한 후보자이다. 가족들과 그레고르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서서 각자의 자기희생을 요구받게 된다.


인간의 조건

변신한 그레고르가 인간일 수 있을까?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아무리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모든 방향으로 기어 다닐 수 있다 해도, 물려받은 가구들로 편안하게 꾸며진 이 따뜻한 방을 지옥으로 변하게 하고 싶었을까? 또한 동시에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과거를 과연 빠르게 완전히 잊고 싶었을까? 그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잊으려는 순간, 오랫동안 듣지 못한 어머니의 음성이 그를 흔들어 놓았다.>


그레고르의 방은 인간이던 그의 방과 달라졌다. 사실 방의 물리적 조건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레고르에 의한 질적 변화가 생겨났을 뿐이다. 이 방의 질적 변화를 카프카는 '가구'라는 소재로 설명하려 한다. 가구와 삶의 관계는 무엇일까? 가구로 채워진 방은 철저히 '쓸모의 방'이다. 어떠한 가구로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해버린 그레고르에게 이러한 쓸모는 더 이상 보장되지 않았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부터 침대는 그레고르에게 수면과 휴식을 제공하지 못했다. 달라진 신체는 달라진 쓸모를 말한다. 

이제 이 방의 가구들은 그의 이동을 '방해'하는 요소로 바뀌었다. 물려받은 가구들이 편안함을 주지 못하고 방을 지옥으로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지옥은 고통과 괴로움, 불편을 이야기한다. 자신만의 천국, 안락함의 방은 이제 불편함과 고통의 방으로 바뀌었다. 방의 질적 변화가 그레고르의 인간으로서의 과거를 잊게 만드는 것은 가구와 방이 인간에게 단순히 물리적 환경만으로서의 의미를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구와 방은 그레고르의 기억의 장소이다. 그의 과거의 삶의 흔적이며 보관소이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 보관소가 질적 변화로 무너져 내리려 할 때 또 다른 요소가 그레고르를 인간으로 유지하도록 돕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이외에 있을까? 철학자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은 사실상 "우리의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라고 말했다. 기억 상실은 나의 삶의 역사의 상실이고 나를 온전히 기억해 줄 유일한 사람인 '나의 상실' 상태이다. 그레고르가 자신을 거의 잃어갈 무렵 그의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보존해 주는 또 하나의 외장하드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그의 '어머니의 음성'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기억의 일부를 자신이 아닌 타인, 즉 인간관계 속에 저장한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억되고 전달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이다.


무쓸모의 쓸모

<어떠한 것도 없어져서는 안 되었다. 모든 것이 그래도 있어야만 했다. 그의 상태에 가구가 주는 좋은 영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기어 다니는 데 가구가 방해가 되었다면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엄청난 장점이었다.>


가구들이 더 이상 쓸모없게 된 것은 사실 그레고르가 쓸모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가구가 방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쓸모없어진 가구가 그레고르에게 어떠한 쓸모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장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쓸모없어진 자신의 거울로서 그것의 쓸모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방안을 '의미 없이' 기어 다닌다. 방이 텅 비어 있다면 그레고르는 '무'의 상태에 놓일 것이고 어떠한 방해도 도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미 없어진' 혹은 '쓸모없어진' 가구들은 그레고르가 이 가구들을 어떻게 피해 다니거나 이용하며 다닐지를 찾아내게 만든다. 스스로 방을 돌아다니는 행위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방을 돌아다니는 유희하는 벌레 그레고르가 된다. 이러한 유희하는 속성은 실존적 존재에게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인간의 또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사랑의 노래>, 조르조 데 키리코, 1914

키리코는 우리의 생활공간인 도시 한가운데 또 다른 일상적 도구들을 놓는 것을 즐겨한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는 사물들, 그래야 할 크기가 아닌 크기의 사물들이 주는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성으로 초현실적 느낌을 자아낸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없어도 될 것들이 즐비할 때 우리는 그 사물들의 쓰임새를 다시금 발견하고자 한다. 무쓸모들의 쓸모를 애써 찾는 것은 그 공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메시아적 영웅 심리

그레고르의 방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여동생 그레테뿐이다. 아버지는 외면했고 어머니는 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가족 중 오빠에게서 유일하게 다른 기대를 받았던 그레텔, 그녀는 그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존재, 즉 뮤즈였다. 그녀를 통해 그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무쓸모화는 그녀에게 쓸모를 강요했고 뮤즈는 자신의 쓸모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여동생의 의견은 달랐다. … 그녀는 그레고르가 기어 다니기 위해 충분한 공간이 필요 없다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 어쩌면 그녀 나이 또래의 소녀들이 갖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만족감을 찾는 열광적인 감각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레테는 좀 더 충격적인 상황을 만들면 자신이 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 유혹되었을 것이다.>


예술의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관점이 <l'art pour l'art(예술을 위한 예술)> 개념이다. 예술이 어떠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초상화와 정물화는 기록의 의미를 갖는다. 예술의 순수한 목적이 예술 그 자체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 존재 그 자체라는 것과 같다. 쓰임 혹은 쓸모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론적 상태, 그것이 실존이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이제 가족의 생계라는 현실적 목적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에게서 빈 공간은 그림을 위한 여백이 아닌 불필요한 것이 제거된 상태, 근대적 사고의 기본인 'tabula rasa'이다. '깨끗한 판'이라는 뜻의 타불라 라사는 불필요한 것의 제거를 뜻한다. 그레테는 이 불필요한 것을 제거할 유일할 존재라고 느끼고 그것에서 만족감을 찾는다. 그녀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실히 해내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더욱 충격적인 상황을 바라는 유혹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역할이 고귀해지기 위해서는 그레고르의 무쓸모는 더욱 부각되어야 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을 밝게 빛난다.


존재가치와 자기희생

이미 쓸모를 상실한 그레고르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아니 증명은 불가능하고 자신의 진심을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텅 비어버린 벽에 진짜 모피 제품을 입은 여인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급하게 기어 올라가서는 그림을 붙들고 뜨거운 배를 시원하게 해주는 유리에 달라붙었다. 그레고르가 몸으로 완전히 덮은 이 그림만큼은 어느 누구도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그레고르의 유일한 취미는 액자를 만들어 걸어두는 일이었다. 이삼일 동안 수고를 들여 걸어놓은 액자에는 모피 제품을 입은 여인의 그림이 들어있었다. 모피는 따스함을 뜻하고 여인은 모성애를 의미한다. 따스한 모성애는 그레고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가족애의 상징이었다. 아버지의 냉담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에서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였다. 그는 자신의 열의가 열정을 그림 위의 유리에 불어넣고 있다. 가족에 대한 희생으로 존재가치를 보장받던 그에게 이 그림은 그것이 투영된 상징적 도구이다.


아버지의 부활과 심판

그레고르가 경제권을 책임지고 있었을 때 아버지의 힘은 가족 안에서 흐려졌다. 그레고르가 쓸모없어지자 아버지는 자신의 쓸모를 재획득한다.


<그런데 정말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예전의 아버지란 말인가? 그레고르가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 침대에 파묻힌 것처럼 피곤한 모습으로 누워 있던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인가. … 하지만 그는 지금 매우 똑바로 서 있었다. 은행 직원이 입는 황금 단추가 달린 빳빳한 푸른색 유니폼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아버지는 힘을 잃었을 때 피곤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하지만 힘을 되찾자 매우 똑바로 서 있다. 수평성에서 수직성으로 뒤바뀐 것은 아버지의 남성성의 회복을 뜻한다. 아버지의 권력이 기대고 있는 것은 더욱 큰 권력, 자본 그 자체를 대변하는 은행이다. 아버지는 은행의 유니폼을 입음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력의 권력을 과시한다. 


힘을 되찾은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처벌을 가한다.


<그때 그의 옆으로 무언가 휙 날아들었다. 사과였다. 이어서 바로 두 번째 사과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레고르는 너무 놀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계속 움직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그를 사과로 때려 맞추려 결심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과가 빗나가고 두 번째 사과가 명중했다. 기독교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첫 번째 사과는 원죄의 사과이다. 두 번째 사과는 구원의 사과를 의미한다.

왼쪽: <원죄>, 티치아노, 1550; 오른쪽: <성모와 사과를 든 아기예수>, 루카스 크라나흐, 1520-30

원죄의 사과는 아담이 신과 맺은 약속의 불이행을 뜻한다. 이것은 신의 분노를 자아내어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만들었다. 에덴동산을 떠나 삶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던 인간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임했다. 그는 원죄의 사과를 기꺼이 스스로 짊어졌다. 아버지의 사과는 피할 수 없다. 그가 그러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심판은 번복될 수 없다.


<그레고르는 기절할 정도로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는 계속 몸을 질질 끌면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못이라도 박힌 듯한 통증은 계속됐고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뻗어버렸다.>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심판을 맞고 격렬한 통증을 느낀다. 그가 겪는 고통을 카프카는 못에 박히는 듯한 고통에 비유한다. 

이젠하임 제단화, 십자가에 못박힘 부분,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6세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의 상처를 성흔(Stigmata)이라고 한다. 두 손과 두 발에 박힌 못에 의한 네 개의 성흔과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로마병사 롱기누스가 창으로 찌른 옆구리의 성흔까지 모두 다섯 개의 성흔이 있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의 고통이고 인간을 지키기 위한 구원의 고통이며 자기희생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신 후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일단 자신의 무쓸모를 받아들이고 가족에 대한 자기희생으로 그들을 지켜왔던 과거와 결별해야 한다. 이제 그의 자기희생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3장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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