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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30. 2024

카프카의 <변신> #11

무관심의 다정함

#전개

그레고르의 변신 이후 그와 그의 가족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한 달 여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 외부인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새로운 가정부는 늙은 미망인으로 이전의 그레고르를 알지 못하므로 그를 벌레로서 대한다. 방 하나는 세명의 신사들에게 임대되었는데 그들과의 동거는 가족들의 공간을 재편한다. 저녁시간 가족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던 거실은 신사들의 차지가 되었다. 거실의 주인이 아버지에서 세 신사로 바뀌었고 여동생의 음악 연주가 그들과 그레고르의 주목을 끌었다. 이 과정에서 그레고르는 세 신사들에게 노출되고 마는데...


무관심의 다정함


<그레고르가 그냥 방치되어 있을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가정부가 있지 않은가. 이 늙은 미망인은 강인한 몸집과 정신력으로 긴 삶의 여정에서 험난한 과정들을 극복했고 그레고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떠한 호기심도 없이 그녀는 우연히 그레고르 방의 문을 열었고, 어느 누구도 쫓지 않았는데도 너무 놀라서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그레고르를 보고는 옷자락을 잡고 놀란 듯이 서 있었다.>


그레고르의 집에 새로운 가정부가 등장했다. 그녀는 그레고르의 과거를 모르는 인물이다. 그의 과거를 모르는 그녀는 그레고르를 현재의 상태로만 판단한다. 그의 삶에 대한 이해 없이 그를 안타깝게 바라볼 수는 없다. 쓸모 없어진 추악한 모습의 그레고르와 같은 이를 가정부는 수도 없이 봐왔을 것이다. 그녀 역시 험난한 과정을 극복했기에 그녀가 그레고르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녀가 그레고르의 방문을 여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무관심, 즉 호기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레고르를 대하는 방식은 차갑다. 그레고르는 그녀에게 단지 일의 대상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방이 그녀의 일을 대상이다. 방을 청소하는데 그레고르는 약간 불쾌한 가구에 불과하다. 변신한 그레고르를 예전 서울역의 노숙자로 생각해 본다면 청소부들의 태도는 가정부와 비슷하다. 산업사회 이후 가족의 역할의 일부를 공동체가 나눠가졌다. 몸져누운 부모님을 자식이 직접 돌보게 된다면 그는 생산활동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초기 사회복지제도는 보다 많은 노동자가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서비스의 일환이었다. 지금의 돌봄 서비스에 종사하는 간병인이 대상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는다면 그는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없다. 가정부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관심의 다정함이다.


<처음에 그녀는 “이리 와 봐, 늙은 벌레야!” 또는 “이 늙은 벌레 좀 보게나!”처럼 친근한 말투로 그를 불렀다. … 가족들이 기분에 따라 그를 쓸데없이 방해하지 않고 차라리 이 가정부에게 그의 방을 매일 청소하라고 시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다정함은 철저한 거리를 지킬 때 표현된다. 그녀는 그레고르의 감정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감정 동요는 그레고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자신의 과거를 더욱 동경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는 가족의 관심보다 그녀의 무관심함을 더욱 다정하게 느낀다.


<스카트하는 사람들>, 오토 딕스, 1920

오토 딕스(1891-1969)의 <스카트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인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작품이다. 신즉물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하는 미술의 흐름으로 현실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던 표현주의(Expressionismus)와 달리 현실을 있는 적나라하게 그린다. 독일어 sachlich는 물질(Sache)의 형용사형으로 물질적인, 객관적인, 사실적인, 냉정한의 뜻을 지닌다. 현실의 이러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딕스의 작품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모습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지속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은 엄청난 수의 상이용사가 발생했다. 150만 명의 군인들이 신체 손상을 입었고 그 가운데 80만에 가까운 수의 병사가 신체의 일부를 상실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사회에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어졌다.

스카트는 독일에서 당시 유행하던 카드게임의 이름이다. 왼편의 사람은 오른쪽 얼굴에 큰 부상을 입고 오른팔이 없어서 오른발로 카드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오른편의 사람은 아래턱이 대체되어 있고 오른팔 부분은 나무 혹은 금속 물질로 만든 기계팔로 끼워져 있다. 그의 왼손은 화상을 입은 듯 붉게 부풀이 있고 코는 떨어져 나가 안대와 같이 생긴 것으로 가려져있다. 뒤편의 사람은 양다리가 테이블 다리와 같은 것으로 끼워져 있고 팔이 없어 입으로 카드를 물고 게임을 하고 있다. 화가는 이 상이용사들의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우리 앞에 드러낸다. 이 무관심함은 비정한 현실에서 자신의 내면만을 관조하며 침잠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자들보다 친절하다. 그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숨겨, 없는 듯한 존재로 만들지 않고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이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의 장애를 지닌 자들이다. 니체는 불구자들에 대한 일방적 연민과 구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나 이보다 더 고약한 것을 보고 있으며 본 일도 있다. 그 가운데서 많은 것은 너무나도 역겨워 하나하나를 열거해 가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이를테면 하나를 너무 많이 갖고 있는 대신 그 밖에 다른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자들, 하나의 커다란 눈이거나 하나의 커다란 주둥이 거나 하나의 커다란 배 아니면 또 다른 커다란 어떤 것일 뿐, 그 이상이 아닌 자들 말이다. 나 이런 자들을 일컬어 거꾸로 된 불구자라 부르는 바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구제에 대하여 中


그레고르는 사회적으로 역할을 상실한, 기능적으로 불구가 된 룸펜이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의 비정상을 자각하게 만드는 시선이다. 그의 과거, 즉 정상상태에 대한 무관심은 그를 과거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다정함일 수 있다. 반면 사회적으로 우수한 기능을 수행하는 많은 이들은 어쩌면 니체의 비판과 같이 전문적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능력을 상실하고 단 한 가지 능력만을 압도적으로 성장시킨 거꾸로 된 불구자일지 모른다. 그들은 능력으로 사람의 쓸모를 평가하고 능력이 없는 자를 비정상이라고 확언하는 냉정함을 '정의(正義)'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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