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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23. 2024

카프카의 <변신> #10

다른 기억 다른 삶

줄거리

방에 갇힌 그레고르의 역할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은 점차 잊혀서 간다. 그레고르와 가족들에게 남겨진 서로에 대한 기억은 각기 다른 매개체를 통해 남겨진다. 그들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의 매개체가 사라져 가는 것은 서로가 바라보는 삶이 방향성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레고르가 그리워하는 것과 가족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 문 밖에서 현실을 살고 있는 아버지와 여동생은 가족을 위한 또 다른 삶을 선택했다. 이제 그들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규칙이 지배한다.


기억과 기념품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부상을 입고 한 달 이상 통증에 시달렸다. 


<사과는 그대로 박혀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뽑아낼 엄두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기념품처럼 육체 덩어리에 꽂혀 있었다 – 그레고르의 현재 모습은 슬프면서도 역겨웠지만 아버지는 그가 가족 구성원이었다는 것을 기억한 듯했다. 그를 적처럼 취급하거나 배척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이 가족의 의무이고, 결국에는 '그의 존재 자체를'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사과가 구원의 의미를 갖든 이성이 가진 폭력을 의미하든 그것은 물질로서 그레고르의 신체에 흔적으로 남았다. 카프카는 이 흔적을 왜 기념품(Andenken)이라고 했을까? 독일어 Andenken은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동의어로는 'souvenir'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souvenir는 라틴어의 subvenire sub '-아래에'와 venire '오다'의 합성어로 '기억'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기념품은 어떠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왼쪽: <칼레의 시민>, 오귀스트 로댕, 1884-95; 오른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203

인간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한 매개체를 예술작품이나 건축물로 남긴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1347년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저항하여 모든 시민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나선 6명의 시민의 용기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이 시민들은 상류층 인사들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를 이행한 예로 주로 언급된다. 사실상 이 이야기가 애국적 민족주의에 의해 미화된 것이나 이 기념비는 과거 역사의 기억을 현대에 전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지역을 점령한 사실을 기념하고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자세한 내용을 건물의 상단부에 써두어 이 건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든 기념비이다.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입구

그렇다면 그레고르의 몸에 박힌 사과는 무엇을 전하고 남기려는 것일까? 독일은 자신들의 과오로 가득한 증거인 유태인 강제 수용소를 그대로 남겨두고 자신들의 기억을 되새긴다. 과거의 자신들의 조상이 나치당에 투표했고 그들이 유태인을 집단 학살했던 일은 그들에게는 지우고 싶은 과거일 터이다. 그들은 왜 이것을 남겨두고 해마다 많은 독일인을 이곳을 방문할까? 그들은 자신들과 나치를 구분하고 연관성을 끊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조차 독일인의 역사의 일부이고 그 과오를 배척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는 것이 역사 교육의 목적임을 분명하다. 그들은 추악하고 잔인한 '그들의 존재 자체를'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레고르의 가족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역겹게 변해버린 아들 그레고르를 참아내는 '가족의 의무'를 행한다. '가족의 의무'는 이 역겨운 벌레가 그의 아들 그레고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의미를 다른 문장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 문장보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참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잘 설명한 말은 없어 보인다.


시간과 기억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1931

살바도르 달리는 더운 날 까망베르 치즈가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기억의 지속>을 구상했다. 녹아내리는 세 개의 시계와 하나의 회종시계와 황량한 배경은 시간 앞에 무기력한 존재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그림의 왼쪽 주황색의 회종시계에는 개미들이 몰려있다. 달리는 개미가 무당벌레와 박쥐의 사체를 한나절 만에 사라지게 만드는 것을 보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공포감, 즉 죽음과 부패를 개미와 파리로 표현했다. 화면의 가운데 작가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하얀 대상이 위치한다. 기다란 속눈썹에 콧수염과 같은 표현은 이것이 달리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무에 걸린 시계와 자화상의 위를 덮고 있는 시간은 달리의 '탄생에 대한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달리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에던 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이자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의 탄생'이다.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잠든 상태의 꿈 혹은 기억, 탄생 직전의 태아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시간의 흐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불멸성과 기억의 이론에 대해 다룬다. 달리는 인간 존재의 필멸성이 기억을 통한 불멸로 극복될 수 있다는 신화적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다른 기억, 다른 삶

그레고르에게는 이제 거실을 훔쳐볼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었다. 가족들은 어두운 방에 누워서 거실의 가족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그레고르에게 허락했다. 아니 그레고르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예전과는 아주 달랐다. 
그레고르가 작은 호텔 방의 눅눅한 침대에 몸을 던져야 할 때면, 그리움을 가지고 생각하던 예전의 생기 넘치는 대화는 확실히 더 이상 없었다. 지금은 대체적으로 너무 조용할 뿐이었다.> 


그레고르의 기억 속에서 가족들은 생기 넘치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이 지금의 그레고르가 그리워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 그 가족은 없다. 그가 맡았던 침묵의 역할을 이제 가족들이 떠안았다. 그레고르가 고객들을 상대로 억지웃음으로 떠들어대다 집으로 와서 그토록 바라던 따스함을 줄 수 있는 가족은 이제 없다.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아버지는 일종의 고집처럼 집에서도 직원 제복을 벗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복을 입은 채 잠들었고, 그의 평상복은 하릴없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는 항상 일을 할 준비가 된 채 집에서도 상사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달라진 가족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아버지다. 그는 하루종일 거실 소파에서 편한 옷으로 뒹굴다가 이제 불편한 제복을 벗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이제 상사의 부름을 기다린다.


<”이게 삶이라니깐. 이것이 나의 오랜 지난날들의 휴식이야.” 두 여자에게 기대어서 그는 귀찮은 듯이, 스스로가 가장 큰 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어서서, 여자들이 문까지 자신을 데려가도록 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오랜 지난날들의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다. 이제 그레고르와 아버지 사이에 공유하던 삶의 기억은 사라지고 다른 기억과 다른 삶이 시작되고 있다. 이 큰 변화는 아버지에게도 버거웠다. 스스로가 가장 큰 짐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변화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본질적으로 집을 바꾸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는, 아마도 전체 친척과 친지들 사이에서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불행을 자신들이 겪고 있다는 생각으로 희망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가족들은 최대한 충족시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직책이 낮은 은행원에게 아침 식사를 받아 왔으며, 어머니는 낯선 이들의 빨래를 하면서 희생했으며, 여동생은 사무용 책상 뒤에서 고객의 요구 사항을 좇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들이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아도 그들의 희망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삶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그것은 그레고르가 맡았던 경제활동이었다. 그들은 이제 과거 그레고르의 기억을 가졌다. 그리고 그레고르는 이제 과거 가족들의 기억을 가졌다. 그들은 각자 다른 기억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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