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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12. 2024

카프카의 <변신> #4

유토피아와 희망

유토피아

우리는 언제나 이상향을 꿈꾼다. 이상향은 현재의 불만, 즉 결핍이나 과잉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정한 또 다른 균형의 상태다. 영어로는 ideal이라는 것이 '이상적인'이란 뜻인데 단어에 포함된 것과 같이 플라톤의 이데아(idea), 즉 도달 불가능한 '상태'라는 의미가 강하다. 다른 단어로는 유토피아(utopia)가 있는데 이 말은 16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대법관 출신의 토마스 모루스(Thomas Morus)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모루스의 <유토피아>의 삽화 中

라틴어 이름인 모루스보다 우리에게는 토마스 모어로 알려진 이 작가는 <유토피아>에서 이상적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한다. Utopia라는 단어는 모어가 만들어낸 단어인데 그리스어의 ou + topos의 조합어이다. ou는 부정접두사로 '~이 아닌', '없는'의 뜻이고 topos는 '땅'이라는 말이다. 결국 '없는 땅'이라는 뜻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존재할 '수 없는'의 가능/불가능의 번역도 가능하다. 하지만 모어는 언어놀이를 통해 eu + topos를 의도하기도 한다. 여기서 eu는 '좋은'이라는 말로 행복을 뜻할 때 euphoria 혹은 eudaimonia라는 단어에서 종종 사용된다 (두 단어는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결국 '좋은 세상'이 너무 좋아서 '없는/불가능한 세상'이라는 무어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모어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친구 에라스뮈스(Erasmus)의 이름을 작품에 등장시키고 그의 제자 '페터 힐레스'를 스페인에서 만나, 그에게서 소개받은 포르투갈의 탐험가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에게서 유토피아라는 나라에 대해 듣는다. 모어는 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요청하고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술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들은 유토피아는 터무니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 나라의 많은 부분이 자신의 영국에도 적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남긴다. 


현실의 유토피아

우리의 삶에서 유토피아는 어떤 곳일까? 정말로 어떤 '땅'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유토피아에 대한 갈구가 '어떠한 상태'로부터의 탈출 혹은 '어떠한 상태'로의 지향이라면 반드시 특정 '땅'일 필요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 유토피아로 북유럽의 몇몇 나라를 꼽지만 막상 그러한 나라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또 다른 유토피아를 꿈꾼다. 결국 충족할 수 없는 갈증을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이 채울 순 없다. 

현재의 불만족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유토피아의 형태는 유지가 되고 구체화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불만족이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면 유토피아의 모습은 그에 따라 늘 변화한다. 유토피아는 우리의 '도피처'일 수 있다. 유토피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현재를 디스토피아(Dystopia)로 만든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로 현실에 대한 부정적 시선으로만 구성된 세계이다. 결국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현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반영한 결과이다. 


그레고르

주인공 그레고르의 현실은 어떤가? 그는 침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침대에 머물며 나서지 않는 것이 '평온'하고 나서는 것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침대는 나서서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는 현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잠시 조용하고 약하게 호흡을 하면서 누워 있었는데, 마치 정적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현실적이고 평범한 상태로의 귀환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가 바라는 '귀환', 즉 그의 노스탤지어(nostalgia)는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한 상태', 즉 '일상'이다. 그가 바라는 기적 '기껏' 일상으로의 복귀이다. 우리는 코로나를 통해 이러한 '일상으로의 회귀'가 유토피아인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잊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상황이었는지를. 그렇다면 코로나 이전의 우리가 어리석어서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것을 모르고 산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노예의 본능인 것일까? 한 가지는 명확하다 우리는 상상력이 부족하는 것. 현재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기껏 상황이 바뀌면 과거 밖에 떠올리지 못하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나의 평온함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적 유토피아는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진통제'에 지나지 않는다.


놀이와 탈출

그레고르는 침대에서 약간의 시도와 큰 실패 그리고 성공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을 겪는다. '하던 대로'의 행위를 바꾸기 위해 그는 '하던 대로'의 사유로 되돌아간다. 그의 고민은 변화를 위한 고민이 아닌 유지를 위한 고민이다. 고민과 걱정은 안정을 추구하게 되는데 너무 진지해져 경직된 사유와 신체를 유발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레고르는 침대에서, '진통제'에 대한 의존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것은 '놀이'다. 놀이는 그냥 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놀이는 늘 새로운 방식을 고안케 하는 것이고, 약속에 의해 언제든 규칙을 변경할 수 있다. 이것은 '목적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게 해주는 하나의 열쇠이다. 모든 것은 고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러한 사고는 언제나 '~을 위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태는 다음의 상태를 위한 것이고, 다음의 상태는 그다음의 상태를 위한 것이다. 언제나 현재는 불완전한 상태의 연속이고 불만족의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된 이 목적론적 세계관은 우리 삶의 강력한 모티브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종교와 결합하는 순간 우리의 도덕은 내세의 보상을 위한 채점표가 되어버렸다. 산업사회에서 채점표는 근면과 성실의 기준으로 구성되었고 채점표에 따라 임금으로 보상되고, 임금은 내세의 보상이 현세에 주어지는 것과 같은 착시를 만든다. 더 많은 임금은 더 많은 노동을 통해 실현된다. 따라서 이 세계관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노력할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 같다.


현관에서 벨소리가 울리고 그레고르는 외부의 분주한 움직임을 감지하지만 누구도 문을 열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문을 열지 않는군." 어떤 무의미한 희망에 사로잡혀서 그레고르는 말했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가정부가 담담한 걸음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지배인이 찾아왔다. 드디어 그레고르의 방문을 열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들이닥친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현관의 문조차 열지 못한다. 현관의 문은 그레고르의 일상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문을 열지 않는다는 그레고르의 "무의미한 희망"은 가족들과 그가 한패임을 보여준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비밀을 알고 있는 그레고르도, 비밀은 모르지만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가족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레고르의 "희망"은 그의 가족들의 "희망"과도 같다. 이 희망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하기에 "무의미"하다. 그리고 현관의 문은 그들의 현실을 현실로만 받아들이는 이에 의해 열린다. 가정부에게 현관의 문은 '폭로', '탈은폐', '비밀'과는 무관하다. 그녀에게 문은 문일 뿐이다. 

<상자를 여는 판도라>,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96

가정부는 그레고르의 상태에 따라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바뀔지 미리 알지 못한다. 능력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고, 다른 집의 가정부로 일하면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치 판도라의 남편인 '나중에 생각하는 자'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를 떠오르게 한다. 


희망의 다른 이름: 자기 부정과 현실부정

그레고르를 자기부정의 상태에서 탈출시켜 주는 것은 첫 번째로 그 자신에게 행해진 '놀이'였고, 그다음으로는 '이후에 생각하는' 일상적 행위였다.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그와 그의 가족에게 남은 것은 '현실부정'이었고, 현실부정은 <무의미한 희망>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가하는 최고의 형벌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었고, 그 간악한 방법은 판도라에게 쥐어 준 '희망'의 상자였다. '호기심'의 저주를 받은 판도라는 이 상자를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고, 상자를 열자 우리가 잘 알듯 갖은 재앙이 튀어나왔다. 제우스는 급히 상자를 닫게 했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 상자 속에는 정말 "좋은 것"이 있을까? 그레고르와 가족들이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해서 상자 속의 것이 그대로 남아 그들에게 "좋게" 작용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자기 부정과 현실부정을 위한 좋은 구실을 제공할 뿐이다.


<... 인간은 판도라가 가져온 상자가 재앙의 상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재앙이 행복의 최대 보물인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인간이 다른 심한 재앙에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면서 계속 새로운 고통에 잠길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희망은 실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제2장 71절 中 -


그레고르의 연장된 고통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인식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내용은 이어지는 '룸펜'과 관련하여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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