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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05. 2024

카프카의 <변신> #3

자유와 안전 / 평온과 절망

카프카가 비판하는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관료주의와 산업사회의 분업화된 생산체계이다. 관료주의와 산업사회에서의 덕목은 주어진 역할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해 내는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치보다는 특징 없는 꾸준함이 덕목이다. 노동자는 열정적인 하루의 기념비적 순간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요구받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무료함과 나른함은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의 소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생산과정에서의 창조적 번뜩임이 사라진 순간 모든 즐거움은 소비를 위한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된다. 생활공간에서 즐거움을 위한 요소들은 효율을 위해 제거되고, 남은 것은 필요에 의한 것으로 채워졌다.

즐거움은 여유보다는 과장된 감각으로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공간이 놀이공원이다. 일상생활의 무료함을 달래는 방법으로 비슷한 양의 일탈을 주는 것은 또 다른 지루함일 수 있기 때문에 압축된 형태의 일탈. 일상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감각, 죽음에 이르러야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일회적 자극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해소하는 기능으로서의 과장된 체험의 공간은 현대 도시의 곳곳에 침투해 있다. 노래방, 보드게임방이나 볼링장, 스크린골프, 피시방, 네 컷 사진관과 같은 축소된 형태의 모험, 공연, 공동체의 단합을 확인하는 모임의 역시 이러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기능을 한다.


자유와 안전

그레고르는 침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벗어나기를 두려워한다. 그의 욕망과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지만 그가 머리를 마침내 침대 밖 허공으로 빼서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게 되었을 때,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더 앞으로 나가는 것이 불안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그가 침대에서 떨어지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분명히 머리를 다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는 차라리 침대에 남고 싶었다. “


그레고르가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자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침대에 남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에게 자유는 그 자체로 소중해 보인다. 우리는 자유의 가치가 긍정적이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두려워진다. 자유는 선택의 자기 결정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를 쟁취해 본 적이 거의 없고, 그것을 부여받았다. 쟁취한 자유는 그것을 얻기 위해 들인 노력만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지속이 필요함을 안다. 하지만 부여받은 자유는 그것이 당연한 듯 여겨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원해서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 일터다. 책임을 지는 것은 미래의 일이고, 미래에 대한 책임감은 불안으로 다가온다. 책임감은 영어로는 Responsibility, 독일어로는 Verantwortung으로 두 단어 모두에 Response/Antwort 즉, '대답'이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보다 능력에 대한 것이 강조되어 있는 듯한데 대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함은 책임감이 우리에게 주는 무게인지도 모른다. 

자유의 날개는 책임감이라는 무게추를 극복할 때 비로소 우리를 날아오르게 한다. 극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려 날개를 접어야만 하고 주어진 권한 내에서의 수행 혹은 복종을 할 수밖에 없다. 관료주의 사회에서 권한은 책임을 의미한다. 주어진 권한은 범위로 드러나는데 권한을 행위할 시 책임감에 대한 부담감은 권한을 수동적으로 행사하게 만든다. 공무원의 일처리 방식에 대해 비난하는 대중의 반응은 공무원들의 책임감이 커질수록 동시에 증가할 수밖에 없다. 만약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는 것은 안전에 대한 지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사되지 않은 권한에 따르는 위험은 자신에게 미치지 않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다. 많은 사회적 참사의 경우 행사되지 않은 권한에 대한 문책은 소극적이거나 지난한 법정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범위의 경계를 벗어난 권한은 너무 소극적일 경우 방종야기하고, 너무 적극적일 경우 권력의 남용으로 이어진다. 


<오디세우스와 시레네>, 존-윌리엄 워터하우스, 1891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두 축은 자본가와 노동자이다. 노동자는 주어진 업무를 성실이 이행하는 것을 덕목 삼고, 자본가는 전체적인 방향성을 잡고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배를 훌륭하게 이끌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유혹하는 수많은 욕망들은 그들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방해물일 뿐이다. 따라서 훌륭한 선장 오디세우스는 그들의 귀를 막아 욕망으로부터 그들을 배제시킨다. 그들은 스스로 욕망을 제거한 산업사회의 훌륭한 덕목인 '근면'과 '성실'을 장착했다. 이것을 덕목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것은 내재화되어 스스로 덕목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변한다. 선장이 이제 "그만 귀를 열어라!"라고 명령해도 내면의 소리는 고집스러운 도덕주의를 고수하려 할 것이다. 자본가는 욕망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위험한 욕망일수록 그들 더욱 자극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 자본가가 욕망에 스스로 노출시키는 것은 그들이 욕망을 알지 못하는 한 소비자들의 구매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흥청'과 '망청'의 설립과 같이 새로운 욕망의 발명과 자극은 자본가를 더욱 높은 위치로 올려놓는다. 다만 자신이 욕망에 이끌려 스스로의 위치를 잃어버리면 이 배는 방향을 잃고 만다. 그는 욕망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나 이끌려가지는 못하도록 스스로를 구속한다. 욕망으로부터 배제된 노동자와 행위로부터 배제된 자본가는 일종의 <이중구속> 상태에 있다.


평온과 절망

그레고르가 침대에 남고 싶은 것은 자유에 대한 불안의 승리였다. 그레고르는 다시금 침대에서 벗어날 것을 고민하지만 그는 또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 바깥의 풍경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따금씩 평온한, 정말 평온한 생각이 절망스러운 결심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순간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창문을 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아침 안개 때문에 약간의 확신과 상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그가 차가운 이성과 합리적 판단으로 사태를 파악하려고 한다는 자기변명의 이성, 도구적 이성을 뜻한다. 이러한 명징한 시각으로 바라보더라도 바깥세상은 명확하게 7시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짙게 드리운 안개 때문인데 이 안개는 완전히 시야를 가리지도, 완전히 시야를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안개는 다가갈수록 옅어지지만 어디까지 이어지는 알 수 없고, 언제 어디서 무엇이 등장할지 모르는 불안의 메타퍼이다. 결국 그레고르는 100%의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부정적 거부감을 이성적 몸부림으로 표현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불확실함은 침대를 벗어나서 벌어질 일에 대한 모호함을 선택하는 절망스러운 결심이다. 침대에 머물게 된다면 벌어지지 않을 확실성은 그에게 평온함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도전은 불확실함으로의 이행이고 이것은 자유이자 책임감의 무게를 짊어짐을 의미한다. 반면 무기력함은 안전을 보장하고 그것은 확실성이 주는 평온함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탈은폐의 상태이다. 자신을 대중에게 드러낸 다는 것은 자신의 쓸모와 무쓸모가 공개되어 스스로가 벌레와 같음이 공표되는 것이다. 그것의 그의 불안의 근거이다.


그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7시는 온다. 이제 더 이상 부질없는 7시에 대한 부정은 그를 위로하지 못한다. 그의 유토피아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닌 일상으로의 귀환이다.


"마치 정적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현실적이고 평범한 상태로의 귀환을 기대하는 듯했다."


COVID-19을 겪으며 우리는 이미 이 귀환의 감정을 이해한다. 노스탤지어 (nostalgia)는 과거의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를 뜻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의 nostos (귀환, 귀향)과 algos(고통)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17세기 스위스 용병들이 타지에서 겪던 고통을 연구한 요하네스 호퍼가 처음으로 만든 말이다. 일상의 우리에게 유토피아는 탈일상적 상황, 일탈의 공간이다. 하지만 비일상적 상황에서 우리는 일상으로의 회귀를 바란다. 


첫 번째 질문은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돌아갈 수 있다면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없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돌아간다 해도 이전의 그곳이 아니라면 세 번째 질문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해 봄 직도 하다.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는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 하고 없다면 벌레로서의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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