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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pr 21. 2024

카프카의 <변신> #1

표지와 도입부에 대한 느리게 읽기

카프카의 <변신>은 독일어로 'Verwandlung'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같은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비디우스가 다양한 주제로 '변신'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카프카는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카프카와 오비디우스가 제목을 왜 <변신>이라고 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해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어떤 해석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느냐 정도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이 책이 출판되던 1915/16년에 어떤 표지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편집장에게 한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벌레 자체를 그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카프카는 왜 벌레 자체를 그리는 것에 반대했을까? 카프카가 논하는 주된 내용 중 하나는 '불안'이다. '불안'은 독일어로 Angst 즉 걱정에 가까운 단어이다. '불안'은 아직 오지 않는 걱정거리이다.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잠재적 두려움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 '불안'이 가진 힘은 사라지고 만다. 근대적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예측가능한' 혹은 '측정가능한'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의 결과는 우연과 즉흥에 대한 혐오였고 일탈과 비행은 악으로 여겨졌다. '불안'은 아직 예측가능하지 않은 영역을 말한다. "그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10년 뒤에 난 뭘 먹고살지?"와 같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예언의 영역을 염탐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 욕망은 채워질 수 없고 끝없는 허기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는 해소되지 않는 허기를 자신을 먹이 삼아 달랜다.

 

불안의 극복? 자기 착취! 

불안을 벗어나는 가장 소극적이자 소모적인 방법은 자기를 착취하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자신이 처한 재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일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기'를 통해 해소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해소되지 않는 허기의 '불안'은 '나'를 갉아먹고 성장한다. 사실상 '바쁘게 만들기'는 일종의 마약에 불과하다. 잠시 그것에 눈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안'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안'의 대부분은 가상의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수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안'에서 가상의 것들을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터다. 하지만 끊임없이 '가상'의 침공은 계속된다. 애써 무시하고 현재에 집중하지 않으면 '불안장애'로 진단은 바뀐다. 이것이 장애로 드러나는 순간 이미 나의 많은 부분은 그녀에게 잡아먹힌 뒤다. 

표지

카프카의 동의를 얻은 위의 표지는 얼굴을 감싸 쥔 한 인간이 검은 방안을 나서는 듯한 장면을 묘사한다. 표지에 벌레가 없다 보니 우리는 이 인간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잠옷을 입고 수면 슬리퍼를 신은 것으로 보아 그레고르일 확률이 매우 높다. 얼굴을 감싸 쥔 남성은 그가 정확히 어떤 모습을 한 인물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불안이 그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익명의 주체 모두가 그의 불안을 공유할 수 있다. 그의 불안은 근대인의 불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불가피한 증세일 수 있다.

그의 뒤로 검은 방이 보인다. 문은 열려있으며 한쪽으로 닫힌 문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공포는 역시 '불안'이다. 대상이 정확지 않을 경우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공포를 감각화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또 다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연쇄작용을 발생시킨다. 반쯤 열린 좁은 방의 입구는 어쩌면 그의 '불안'의 근원, 그의 무의식으로의 입구를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떻게 이 방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불안'과의 만남의 장소

카프카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열어젖힌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Als Gregor Samsa eines Morgens aus unruhigen Träumen erwachte, fand er sich in seinem Bett zu einem ungeheueren Ungeziefer verwandelt.) 

그레고르는 '꿈'에서 깨어났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꿈이 아니었다."라 기술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깨어난 꿈이 확실하다. 장주의 나비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 없다. 이 시기 이미 유명인사가 된 프로이트는 '꿈'이라는 공간을 무의식이 흘러나오는 곳이라 했다. 무의식이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꿈이라는 형태로 시각화된 어떤 징조 같은 것이다. 상담자인 프로이트는 그들의 말을 듣고 이것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에 몰두했다. '불안'을 '공포화'하여 실체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 미래의 것이 아닌 과거 혹은 현재의 것으로 내 앞에 세우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이것이 <정신현상학>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꿈이자 멋진 계획에 대한 확인과도 같았다

그레고르가 죽고 그의 부모와 여동생은 드디어 집을 탈출하고 소풍을 나선다. 그러면서 새로운 꿈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꿈'에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무의식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후 출간된 다른 표지 중 하나를 보면 책상 위의 책 읽는 남자의 그림자가 벌레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악몽과 같은 상황일 수도 있고 그림자가 그의 내면을 비친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과 그림자가 드리운 배경 그리고 책상의 패턴이 모조리 그리드 모양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재단된 듯이 정사각형의 반듯반듯한 모양으로 구성된 곳에 곡선의 벌레의 형상만이 이성의 직선을 깨뜨리고 있다. 

또 다른 표지는 그의 방을 보여주는 듯하다. 창백한 방에 놓인 의자 하나. 앉은 이는 없다. 아무도 없는 듯한 방에 그가 홀로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방에 소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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