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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pr 28. 2024

카프카의 <변신> #2

반복되는 삶과 관료주의

프란츠 카프카가 살던 20세기의 경계는 자본주의가 유럽 사회 전반의 주류가 되었고, 그 결실을 곳곳에서 맺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주는 '편안함'들은 자본주의를 도구가 아닌 목적인 것처럼 느끼게 했고, 주인을 위해 일을 할 줄 알았던 그것은 이제 주인이 그것을 위해 복종하는지도 모르는 자발적 구속상태에 놓이게 했다. 이제 자본의 자기 증식 욕구에 자발적 참여를 하며 자기 착취를 통해 스스로를 그것의 발전에 헌신케 했다. 이러한 부작용들은 카프카 이전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가 경고했던 바였다. 인간은 '편리함'과 '안락함'을 위해 자신의 많은 권리를 포기했다. 카프카는 <변신>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품화된 인간, 반복적인 삶을 사는 인간을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로 표현한다. 그의 업무처리 방식은 철저히 자기 착취의 구조를 보이며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되었다. 결국 '자기'라는 알맹이는 빠진 '자기의 쓸모'에 천착한 '자기 연민'만이 남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구조는 행정적으로는 관료주의에서도 흔히 보이며 같은 시기 근대국가가 형태를 갖춰가면서 효율적 행정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명령 전달과 수행의 단선적 위계관계를 구축했다. 이것이 관료주의이다.


무쓸모의 공간: 침대

산업사회에서 노동의 공간과 대비되는 공간은 어디일까? 집 혹은 좁게 보자면 거실과 방은 과연 노동에서 해방된 공간일까? 반노동적 공간으로 보이는 침대는 이를 꽤나 잘 드러내는 듯하다. 그레고르가 침대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아를의 침실>, 빈센트 반 고흐, 1888

"우선 그는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고 무엇보다도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침대에서 계속 생각한다고 이성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레고르가 침대를 휴식의 공간, 반노동적 공간으로 생각한다면 노동에 대한 일체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하루의 계획을 침대에서 시작한다. 그에게 침대는 노동을 하기 위한 충전소다. 인간이라는 노동기계에게는 몇 가지 인풋이 필요하다. 연료와 냉각. 연료가 없으면 기계가 굴러가질 않고, 냉각이 없으면 지속적 소모에 의해 기계가 망가진다. 이 모든 것은 생산의 과정에 포함된다. 침대에서 계속 생각한다고 이성적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침대에서는 충전을 수행하고 완료되는 즉시 생산활동을 위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충전의 공간에서는 충전만을, 생산이라는 이성적 결론은 산업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체계적이고 분할된 시스템을 보여준다. "인간은 잠을 자야만 한다."라는 문장에서도 인간의 생을 위한 수면보다는 생산을 위한 수면이 인간이라는 도구에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읽을 수 있다.


침대에 쓸데없이 머물러서는 안 돼.

이 말에서 그레고르의 침대에 대한 인식이 여실히 드러난다. 충전소로서의 침대에 필요 이상으로 머무는 것은 쓸데없다는 의미가 첫 번째이고, 침대 자체가 쓸데없음, 즉 무쓸모의 공간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19세기 산업사회에서 노동자에게 부여된 노동시간은 12시간을 훌쩍 넘겼다. 많으면 15시간까지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그들이 바친 시간에 대한 교환물이었다. 그들이 노동하지 않는 시간은 잉여의 시간이었으며, 그 가운데 출퇴근과 식사 시간은 최소한의 비용이었다. 수면은 육체를 위한 시간이지 정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노동자 숙소에 대한 절실함은 20세기 초반 베를린의 지멘스슈타트 (Simensstadt)에서 실현되었다. 

<Siemensstadt>, Berlin, 1914

지멘스슈타트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양질의 숙소와 위생적인 주거환경을 조성하는데 이바지했다. 물론 비판적 관점에서 보자면 질병으로 잦은 병가를 내는 노동자들 때문에 생산성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일종의 투자이기도 하다. 이 시간에 만들어진 많은 주거단지는 다층의 균일하고 위생적인 집을 만드는데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반면 출퇴근을 위한 보다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하는데도 역시나 한몫을 담당했다. 노동자들의 위생과 출퇴근의 용이함은 생산과정의 차질을 줄일 수 있었고, 보다 효율성 있는 생산시스템을 완성했다.


내면화된 도덕과 감시

그레고르는 자신이 처한 불행에 대해 타인의 시선으로 관찰한다. 출근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한 불안에 견디기 힘들어한다. 

몸이 아프다고 알리면 어떨까? 그러나 그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고, 또 수상쩍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5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그레고르는 지금껏 한 번도 아팠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사장은 의료보험 취급 의사와 함께 집을 찾아와서는 아들이 게으르다고 부모님을  나무랄 것이다.

몸이 아프다고 알리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일이라는 인식은 충격적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이 자신의 무쓸모를 알리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에서의 죽음과 동일한 고통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5년 동안 병가가 없었다면 이해받을 수 있는 충분한 신뢰를 쌓았다고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스스로의 평가는 박하다. 단 한 번의 실수는 그의 모든 쓸모를 무쓸모로 바꾸는 냉정한 평가가 그레고르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재미난 사실은 사장이 그레고르를 나무라기 위해 대동한 '의료보험 취급 의사'의 존재이다. 관료사회에서 역할의 구분은 명확하다. 산업체를 꾸려가기 위한 제반의 계획과 수행을 이끄는 사장은 정치적으로 행정부에 비유할 수 있다. 구성원의 행위가 올바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신적인 권위는 '의료보험 취급 의사'에게 달렸다. 그는 사법부를 떠오르게 한다. 그들이 만들어 낸 기준과 법은 그레고르의 내면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을 스스로 구분하게 만든다. 그들의 기준은 그의 내면에서 체계화되었다. 


'내면화된 도덕'은 완전한 감시자를 만들어냈다. 감시는 다면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들을 나무라는 부모님', 스스로 '수상쩍게 보이기도 할 것'같은 자기 감시 그리고 '의료보험 취급 의사'의 전문가적 진단이 그것이다. 그레고르 자신이 가족들에게 가지고 있는 '의무감'이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방을 열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만드는 특권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감시하는 이 내면화된 도덕은 '양심'이라는 형태로 완전무결한 도덕적 행위의 수행을 강요한다. 노동시간의 법제화와 연차, 휴가의 자율적 사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모든 예외상황 (결근)은 철저한 자기 감시에 의해 통제된다. 자신도 모를 수 있는 내면의 부분에 대한 감시는 완전무결한 판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은 완전무결한 감시자로서 '내가 숨기는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나' 모두를 감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의료보험 취급 의사'는 기술적 진단을 통해 나도 모르는 나의 '노동가능성'을 선고한다.


불안과 공포

쓸모와 무쓸모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레고르의 감정은 불안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불안은 아직 오지 않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고, 공포는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그것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불안은 미래의 것이고, 공포는 현재의 것이다. 근대 사회는 공포의 대상을 도시에서 제거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부랑자, 거지, 광인과 같은 예측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지도 모르는 이들을 배제했다. 그들이 일반 시민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시설, 혐오시설 등은 외진 곳 혹은 소외받은 이들의 근처에 위치한다. 대다수의 혹은 힘 있는 자들의 눈에서 공포의 대상은 점차 줄어갔다.


공포를 제거해 주는 대신 우리를 통제하는 것은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다. 오늘과 다를지도 모를 내일에 대한 걱정은 각종 보험서비스를 통해 '불안'을 대처하는 듯한 속임수를 만들어냈다. 

<시지프스>, 티치아노, 1549

'불안'은 근원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 기인한다. 내일의 내일에 대한 불안은 종국에는 자신의 소멸,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귀결된다. 시지프스가 받은 형벌은 무한의 고난이다. 더 큰 고통은 그 고난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삶 속에서 '불안'을 잊는 첫 번째 방법은 '자기 착취'이다. '불안'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이다. 아무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자신이 몰두하는 시간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준다는 안도감을 주고 이 안도감이 '불안'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해 준다. 끝없는 안도감에 대한 갈구는 자기 스스로를 과도한 노동으로 내몰아 연속되는 '일시적' 위안을 마약처럼 공급받는다. 


니체는 이러한 '불안'의 극복해 대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아모르파티(amor fati)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그러나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필연적인 것'은 '죽음'이다. 그것은 감출 수 없다.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은 이것을 감추려는 관념론이다. 죽음 이후에 우리의 삶이 이어진다는 가상의 것에 불과하다. 죽음 이후에 무언가 존재하다는 믿음은 '죽음'자체에 대해 유예를 주는 듯하다. 실상 사후 세계에 대한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내세를 위한 투자라고 믿게 하여 이 불안을 미룰 뿐이다. 미루는 것이 부정적인 것에 그친다면 나름의 효과도 클 것이나, 긍정적인 것 역시 미루게 된다. 모든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는 것. 니체가 말하는 '필연적인 것'에 대한 사랑은 '죽음'이 우리의 생에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생 속'에서 그가 바라던 것을 시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모르파티가 카르페 디엠 (carpe diem)과 맞닿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현재'에 대한 긍정, '오늘'의 내일에 대한 승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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